지구에서 가장 뜨거운 심장
선생님은 저에게 조국이 있다고 하십니다만, 다시 한 번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저에게는 조국이 없습니다. 개돼지보다도 못 한 취급을
당하면서 마실 물도 얻어먹을 수 없는 이 땅을 어떻게 저의 조국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나라의 종교가 어떻게 저의
종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눈곱만 한 자부심이라도 갖고 있는 불가촉천민이라면 이 땅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_ 간디와의 대화에서
'달리트'는 인도 불가촉천민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하리잔'이라고도 이른다. '하리잔'은 간디가 붙여 준 이름으로 '신의 아이들'이란
뜻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신도 버린 아이들'이라고 불린다. 인도의 카스트는 4계급으로 나뉘어 있지만, 달리트들은 이 카스트 체제에조차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부정 타는 것이 두렵다는 이유로 신체적 접촉마저 금하는 인간 이하의 존재들. 이들은 인도 전역에 거주하며, 그 숫자는 1억 명에 달한다. 청소, 세탁, 이발, 도살 등 가장 고된 최하층의 일들을 담당하지만 사회 참여는 꿈꿀 수조차 없고, 거주와 직업 등에 있어 엄격한 차별 대우를 받으며, 가난과 무지와 열등감에 찌든 삶을 살아야만 한다.
암베드카르는 인도 중부의 작은 도시 모우에서 불가촉천민인 군인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날은 부처님오신날과 겹친 매우 상서로운 날이었지만, 출신 성분 때문에 그는 어려서부터 온갖 멸시와 수모를 겪는다. 당시 불가촉천민에게는 공동시설을 이용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기에 물 한 모금 마시기도 어려웠고, 집에서 가져온 삼베 자락을 깔고 교실 한구석에 앉아 수업을 들어야 했으며, 심지어 일부 교사들은 부정 타는 게 두려워 그에게 질문하거나 공책에 손을 대는 것조차 꺼렸다. 뿐만 아니라 학교 밖에서는 그에게 '저에게 손을 대지 마세요' 란 딱지가 붙어 있는 듯했다. 끝없는 멸시의 그늘 속에서 어린 암베드카르는 존재의 깊은 곳까지 상처 입는다.
어느 날 수학 교사가 암베드카르를 불러내 칠판에 쓰인 수학 문제를 풀라고 했다. 그러자 갑자기 학생들, 특히 상위 카스트 출신 학생들이 목청을 높여 소란을 떨기 시작했다. 만약 암베드카르가 칠판에 손을 대면, 그 칠판 뒤에 넣어 놓은 자기들의 도시락이 부정을 탄다는 것이었다. 결국 학생들이 도시락을 칠판 뒤에서 모조리 끄집어낸 다음에야 암베드카르는 칠판 위에다 수학 문제를 풀 수 있었다.
마침내 암베드카르는 불가촉천민들이 겪는 이 모든 굴욕이 사회적 저주에서 오는 것임을 깨닫고, '나와 똑같은 불운을 안고 살아가는 수많은 민중들을 사회적 노예제도의 멍에에서 해방시키는 일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치겠다.'는 엄숙한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만약에 불가촉천민들을 이 끔찍한 불의와 비인간적인 차별 대우의 족쇄에서 해방시킬 수 없다면, 나의 삶을 총알 한 방으로 끝내 버리고 말리라'
암베드카르는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공부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아버지였다. 정신을 집중해서 공부하기에는 사방이 고요한 새벽 시간이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한 암베드카르는 매일 새벽 두 시에 일어나 공부를 했는데, 그의 아버지 역시 같은 시간에 잠에서 깨어나 아들의 공부를 거들어 주곤 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마침내 그는 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매일 저녁 봄베이의 한 공원에 가서 책을 읽으며 공부에 몰두하던 암베드카르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한 사회사업가이자 교육자가 그에게 바로다 번왕과의 만남을 주선해 준다. 이 만남을 통해 암베드카르는 장학금을 받으며 인도의 봄베이 대학교를 무사히 졸업한 뒤,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하루 열여덟 시간을 공부에 쏟아 석사 과정을 마친 후, 런던으로 건너가 변호사 자격 취득을 위해 '영국변호사협회'에 가입한다.
스물여섯 살의 암베드카르는 지금까지 장학금을 받은 대가로 인도로 돌아가 바로다 왕국에서 10년간 봉사를 해야 했다. 그는 불가촉천민의 문제를 지대한 관심을 가진 한 군주의 군사 담당 비서관으로 임명되지만, 그토록 학식이 높고 고위직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가촉천민이라는 이유만으로 비인간적인 냉대와 멸시를 받아야 했다.
'사람들은 나에게 서류를 건네주는 대신 집어 던지기 일쑤였고, 심지어 내 발이 사무실 카펫을 밟고 있다는 이유로 그 카펫을 모조리 말아 제친 다음에야 출입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깊은 환멸을 느낀 암베드카르는 결국 사표를 내고 봄베이로 돌아온다. 1년간 온갖 잡동사니 일들을 하다가 봄베이 시드넘 상경대 교수로 취임하게 되지만, 이곳에서도 카스트의 차별은 여전했다. 교수 휴게실에 놓인 주전자에서 냉수조차 함께 마실 수 없었다.
저는 힌두 사회의 최하층민 출신이기 때문에 교육의 필요성을 그 누구보다 절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최하층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결코 의식주 문제의 해결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성장 과정에서 물들어온 노예로서의 열등감을 어떻게 해서든 떨쳐 버리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조국에 대한 사명감을 회복하는 일이 가장 시급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고등교육입니다. 저는 오직 고등교육만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이라고 믿습니다.
암베드카르는 고등법원 변호사로 실무에 뛰어들면서 '불가촉'이라는 사회적 저주와 정면으로 맞서 싸우기 시작한다. 오랜 시간 인도 사회에 만연해 있던 빈곤과 카스트의 차별을 체험한 그는,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과 카스트의 차별을 척결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문제는 재산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불평등한 분배에 있다.' 고 말하면서, 평등한 분배를 위한 사회조직을 갖출 것을 주장했다. 중요한 것은 단순한 생존이 아닌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빈곤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이 사회를 지배하는 카스트제도에 있음을 그는 익히 알고 있었다.
빈곤 역시 이 카스트제도를 바로잡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불가촉천민들의 인권을 주장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만큼 인도 사회에는 카스트제도가 뿌리 깊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상위 카스트들은 불가촉천민들이 사회에서 자신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그 권리를 행사하려는 태도에 깊은 모멸감을 느끼며, 그러한 행동들을 온갖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저지하려 하였다.
1923년 봄베이 입법의회는 저명한 사회개혁자 볼레의 제안으로, 불가촉천민들에게도 급수시설, 우물, 학교, 병원 등 모든 공공시설의 이용을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법안이었다. 그리고 이 법안에 따라 진보적인 성향의 마하드 시 당국자들은 초다르 저수지의 식수 사용을 불가촉천민에게 개방했다.
그러나 상위 카스트 주민들은 불가촉천민이 초다르 저수지에서 물을 떠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암베드카르는 초다르 저수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천명하기 위해 대중집회를 열기로 결심한다. 그는 1만여 명의 불가촉천민들을 이끌고 공공 급수시설에서 물을 마실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며 마하드에서 초다르 저수지까지 행진했다. 그리고 초다르 저수지에서 직접 물을 떠 마심으로써 불가촉천민들도 물을 마실 권리가 있음을 온 천하에 천명한다. 이에 행진에 참여한 대부분의 사람들도 물을 떠 마시며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해 보였다.
하지만 격분한 상위 카스트 주민들은 마을로 되돌아가고 있던 불가촉천민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위 정통파 힌두교인들은 '부정 탄' 저수지를 정화하는 의식을 치른다며, 소의 배설물과 우유가 든 질그릇 항아리 108개를 물속에 담가 두고 만트라를 낭송했다. 결국 마하드 시 당국자들은 초다르 저수지를 불가촉천민에게 개방하기로 한 당초의 결정을 철회하기에 이른다. 이에 암베드카르는 다시 대중집회를 열어, 카스트 계급들 간의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있는 힌두교 법전인 마누법전의 사본을 태워 묻는 화형식을 거행하며 불가촉천민들의 인권을 선언한다.
저는 이 초다르 저수지에서 물을 마시지 못한다고 해서 결코 우리가 멸종되지 않을 것임을 우리를 적대시하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말해 주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 저수지로 가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대회가 열린 목적은 이 땅 위에 평등의 시대를 열기 위함입니다.
그 후 암베드카르는 나시크의 칼라람 사원 출입권을 얻기 위한 투쟁에 나선다. 1만 5천여 명의 군중들이 운집한 가운데 칼라람 사원으로의 긴 행렬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했을 때 사원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경찰이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다음 날부터 이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사원에 들어가다가 일부러 붙잡혀 가는 비폭력 시위를 벌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런 운동조차도 소위 정통파 힌두교인들에게는 엄청난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불가촉천민들은 여러 가지 괴롭힘과 학대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렇게 5년을 끌어 오던 이 운동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는데, 정통파 힌두교인들을 굴복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암베드카르는 인근 마을 욜라에서 군중집회를 연다. 그는 힌두교와 결별한 다음, 그들에게 평등하고 안정된 지위와 정당한 대우를 보장해 주는 다른 종교를 선택할 때가 되었다고 선언한다.
불행하게도 저는 힌두교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저로서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여러분 앞에서, 제가 힌두교인으로 죽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고 엄숙하게 선언하는 바입니다. 우리들 각자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자유와 평등과 사랑입니다. 여러분의 경험에 비추어, 이 같은 필수 요건들 중 어느 것 하나라도 힌두교가 갖추고 있다고 보십니까?
그는 불가촉천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카스트제도와 온갖 계급 간의 모순들을 인정하는 힌두교를 버리고 개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새로운 종교를 선택하려는 모색의 과정이 시작된다. 나아가 그는 불가촉천민들의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해방을 위해 자신의 모든 힘과 노력을 기울인다.
힌두교를 중심으로 인도의 통합을 원했던 간디는 불가촉천민들에 대해 연민과 동정심을 가지긴 했지만, 카스트제도에 있어서는 정당성을 인정하며, 각자 타고난 맡은 일에 충실할 것을 주장했다. 간디는 모든 직업은 평등하다고 말하면서, 불가촉천민들을 힌두교의 틀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암베드카르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그것이 얼마나 허황된 말인가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결국 암베드카르는 힌두교와의 결별을 선언한 지 20년 만에 불교로의 개종을 선택한다. 그가 오랫동안 불교 관련 문헌을 연구하며 숙고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는 불교야말로 인도 사회에서 불가촉천민들의 인권을 회복하고, 의식을 해방시키며, 여느 사람들과 다름없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철학을 담은 종교라고 보았다.
의심의 여지 없이, 붓다의 길은 억압받는 사람들과 인도 국민, 나아가 인류 전체에게 유익한 길이다. 붓다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곧 노예적인 사고방식으로부터의 해방, 경직된 계급의식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상하 계층구조에 따른 불평등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이 길을 따르는 사람들은 삶의 모든 부문에서 평등하고 자유롭게 함께 어울려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는 나그푸르에서 개종 의식을 거행했다. 이날 흰옷을 입은 50만 명의 인도인들이 이 의식에 참석해 개종했으며, 그다음 날에는 전날 참석하지 못한 10만여 명의 사람들이 몰려와 불교로의 귀의서약을 복창하며 대대적인 개종 의식을 치렀다. 이 개종식에서 암베드카르는 말한다.
종교는 인간에게 희망을 갖게 하며 선한 행동을 하도록 올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하지만 힌두교는 인도 민중의 희망을 짓밟아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롭고 희망에 찬 길을 발견했습니다. 이 길은 우리에게 행복과 번영을 약속하는 대로입니다. 그것은 결코 외국에서 들어온 낯선 종교가 아니라, 이미 2000여 년 전에 이 땅 위에서 번성하던 우리의 종교입니다.
그는 비록 역사적인 사건이 있은 뒤 8주 만에 세상을 뜨지만, 불교로의 개종운동은 조금도 굽힘 없이 진행되었다. 인도 마하보디협회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붓다의 나라인 이 땅에서 불교가 자취를 감춘 지는 벌써 800년이나 된다. 하지만 암베드카르 박사가 불교로 개종함으로써 인도의 불교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다."
인도인들에게 '아버지'라는 뜻의 '바바 사헤브'라 불리는 암베드카르. 그는 1956년 12월 6일 이른 아침, 잠이 든 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이날 네루 수상을 비롯한 수많은 의원들이 그의 죽음에 조의를 표했다.
암베드카르는 죽기 전까지도 밤늦게 작업을 하며 다양한 주제에 관한 방대한 양의 자료와 책을 연구하고 집필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비록 떠났지만 현대 인도 헌법의 기초자이자 탁월한 행정가, 최하층 계급의 지도자이자 용감한 인권 옹호가, 뛰어난 교육가이자 불교 부흥운동의 아버지로, 무엇보다도 불가촉천민들의 바바 사헤브로 오늘날에도 인도인들에게 숭배와 존경의 대상이다.
암베드카르의 불굴의 투쟁으로, 인도에서는 1955년 불가촉천민법이 제정되어 하리잔에 대한 종교적, 직업적, 사회적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입학이나 취업 시 일정 비율을 이들에게 배정하는 혜택을 주고 있으며, 하리잔 출신의 장관도 배출되었다. 이처럼 법적으로는 차별이 금지되었으나, 인도 전역에는 아직도 계급 차별의 관습이 강하게 남아 있어 하리잔들은 절대적인 차별과 가난 속에 살아가고 있다.
<암베드카르>는 2006년 7월 법정 스님의 추천으로 맑고향기롭게 소식지의 '맑고 향기로운 책'으로 소개되었다.
* 디완 챤드 아히르 : 1928년 인도 펀잡에서 태어났다. 그는 과거의 찬란했던 불교문화를 현대의 인도적 상황에서 그들에게 잘 설명해 줌으로써 인도 역사에 아주 중요한 기여를 한 불교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불교에 관한 저술만 해도 20여권에 달할 만큼 명성이 높다. 불교 잡지에 대한 꾸준한 기고와 국제 불교 학회에서의 왕성한 활동은 이미 정평이 높다. 그는 또 인도 정부의 주요 공직자로서 교통부 국장을 역임하고 1986년에 은퇴했다.
_ 문학의숲 편집부엮음 <법정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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