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종교

함께 행복할 수는 없는가.

정정진 2009. 2. 13. 23:13


 

함께 행복할 수는 없는가
 
싯다르타 태자는 농경제를 계기로 깊은 사색에 잠기는 경우가 잦아졌습니다. 명상의
주내용은 '왜 생명들은 불공평한 관계속에서 고통받아야 하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의문은 왜 모두 함께 행복할 수 없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기존에 스승들로부터 배운 것들은 백성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지, 장례는
어떻게 치루는지, 전쟁은 어떻게 치루는지, 여자는 어떻게 다루는지 하는 것들 뿐으로
고통받는 자연의 생명체들이 왜 저런 고통을 받고 있는지, 왜 모든 사람이 함께 행복할
수는 없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답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었던 가치들에 대해서 '아, 이것만이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듯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를 하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구체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 바로 농경제였습니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
니고 책을 통해 얻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현실속에서 부딪치며 자각한 것이었습니다
 
현실의 모순을 직관하면서
 
고오타마는 먼저 수행의 방법에 대한 것을 점검하고는 곧 이어 수행의 자세를 점검하
던 중에 하나의 큰 발견을 하게 됩니다.
'내 생각하건대 지난 날, 출가하기 전에 카필라 성을 나와서 농부들이 고통스럽게 밭가
는 것을 보았었다. 그때에 한 그루의 염부수가 만들어 준 시원한 그늘밑에 앉아 있으면
서 모든 욕망으로 물든 마음을 여의고 일체의 고통을 주는 법을 극복하고 중생을 구제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킴으로써 적정한 상태를 얻어 초선을 증득하였었다. 나는 이
제 다시 그 선정을 생각하리라. 이 길이 바로 보리에 향하는 길이로다.'
 
싯다르타의 순수한 마음 속에 비추어진 농경제는 싯다르타에게 초발심이었던 것입니
다. 농경제의 참상은 어느 때보다도 그들의 아픔이 싯다르타의 가슴에 깊이 와 부딪쳤
을 것이며 오로지 그들의 고통을 안타까와 하면서 무엇을 바쳐서라도 그들을 반드시
구해주겠다는 일념으로서 선정에 들었을 때의 마음은 가장 절실했을 것입니다.
다른 어떤 사상으로 가늠하여 본다든가 추측하는 것도 아니고 고통의 현장을 일단 떠
나서 그들을 위해 걱정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고통받는 소와 벌레, 새, 그리고 왕과 농부의 모습은 설명할 필요도 없이 모순된 현실
그 자체로 두 눈에 꽉 차도록 들어오고, 고통에 찬 소의 울음과 각축하는 새들의 쪼작
거림, 그리고 농부의 탄식과 왕의 너털웃음이 뒤섞인 채 가슴속까지 들어와 맺히고, 햇
빛에 그을려 구겨진 농부의 피부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과 하늘을 가르며 소의 등을 후
려치는 채찍의 울림과 경련하는 소의 근육, 죽지 않으려고 발악을 하며 꿈틀거리는 굼
벵이의 몸짓 등이 온 몸을 저리게 하는 그러한 상황속에서 느꼈던 싯다르타의 문제의
식만이 모든 문제를 풀어갈 수 있으리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제 여래의 세계를 선포하노라
 
그때에 고오타마는 새벽녘에 이르러 누진신통을 완성하고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로써
생사고통의 사슬을 끊고 뭇 중생을 제도할 신통을 체득하였다. 그때에 고오타마는 동
쪽에서 솟아오르는 밝은 새벽별을 보는 순간 무상정등정각을 완성하고 큰 소리로 사자
후하였다.
 
" 이제 어둠의 세계는 타파되었다.
  내 이제 다시는 고통의 수레에 말려들어 가지 않으리.
  이것을 고뇌의 최후라 선언하며 이제 여래의 세계를 선포하노라 "
 
미묘한 법의 바퀴를 굴리소서
 
부처님이 안고 있던 고민, 즉 출가의 계기가 되었던 가장 큰 문제는 왜 모든 사람이 함
께 행복할 수 없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존
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서로 시기하고 짓누르고 타인의 고통 위에 자신의 행복을
쌓는 것이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성공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해도, 그 누구도 영원히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서로 고통만 주게 될 뿐입니다. 한 손가락이 옆 손가락에게 고
통을 주면 그 고통이 어디로 갑니까?
 
물론,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제 손가락으로 제 손가락을 아프게 할까 하는 생각도 들겠
지만, 사실 우리 삶의 대부분은 이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지난 밤의 어마어마
했던 깨달음의 순간을 새로이 정리하여 보고자 계속 그 자리에서 명상에 들어갔습니다
마군의 군세와의 싸움, 신통을 통해 보았던 무한한 화엄의 세계, 그리고 법열등을 반추
하며 자신의 깨달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감로의 문을 열리라
 
당시 인도 민중들의 고통과 구원에의 갈망은 절정에 달하였습니다. 부처님만이 어둠
속에서 등불을 밝혀 그들을 구제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희망이요, 의지처인 까닭에 모
든 사람들이 부처님 오시기를 고대했습니다.
 
부처님이 계속 나무 아래에서 계셨던 것은 더 이상 법열을 즐기고자 한 것도 아니며,부
처님의 정법을 전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고민한 것도 아닙니다. 고통 속에서 헤
매이는 그들의 고통을 가슴 깊이 느끼며 자신이 중생의 구제를 위하여 이 땅에 온 것이
라는 주체적 삶의 자각을 상기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법은 전해야 하되, 어떻게 하
면 올바로 전할 수 있을까 하는 방법을 고민하였던 것입니다.
 
연기를 깨달았으면 대비행, 즉 무한한 자비심은 그대로 일어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실
천적 행위로 옮겨져야 합니다. 즉 깨달음은 끝이 아닙니다. 그런데 불교공부를 잘못하
면 깨달음이 목적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 법륜스님의 '인간붇다 그 위대한 삶과 사상'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