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경영

평범함은 최고의 자질이다_ 서메리

정정진 2019. 9. 19. 10:02


"번역을 한다고? 그럼 영화 엔딩 크레디트에서 네 이름을 볼 수 있는 거야?"


"책이 나온다니, 그럼 넌 이제 평생 인세로 먹고살겠네?"


"작가라면 너도 <해리포터>같은 베스트셀러 한 권 써야지!"


이 모든 말은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일한다고 했을 때 내가 여기저기서 실제로 들은 것들이다. 물론 나는 블록버스터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에 이름을 올리는 번역가가 아니고, 인세 수입으로 평생 호의호식할 수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글을 쓰고 번역을 하면서 적당히 먹고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벌고 있다. 정확한 수치를 제시할 수는 없지만, 사실 전체 프리랜서 중 90% 이상은 나처럼 스타나 예술가와 거리가 먼 생계 밀착형 직업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업계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작가'라고 하면 조엔 롤링, '개발자'라고 하면 스티브 잡스, '일러스트레이터'라고 하면 요시토모 나라가 떠오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평범한 프리랜서가 이런 사람들과 비교된다는 것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저런 이들이 있기에 그 업계의 위상이 높아지고 개인적으로 자극받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꼭 나쁜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프리랜서'의 각 분야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신통하고 특출 난 재목이다 보니, 프리랜서를 꿈꾸면서도 자신에게는 저 정도의 끼가 없다는 이유로 지레 포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만약 당신의 야망이 프리랜서 세계에 뛰어들어 부와 명예를 거머쥔 업계의 1인자가 되는 것이라면, 압도적인 재능을 갖추는 것 외에 내가 알려 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혹시 다른 곳에서 엄청난 재능 없이도 스타가 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는 분이 있다면, 부디 이 책에 적힌 연락처를 통해 나에게도 공유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하지만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프리랜서의 절대 다수는 스타와 거리가 먼 소박한 직업인들이고, 그들의 밑천은 평범한 이들이 엄두도 못 낼 재능이 아니라 무난한 기술과 약간의 차별성이다.


프리랜서의 세상은 무한히 넓고 깊기 때문에, 그중에서 어떤 분야를 선택해서 도전할지는 순전히 본인의 취향과 적성에 달린 문제다. 처음부터 수익 창출에 도움이 될 만한 기술을 갖고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혹시 그렇지 못하다 해도 이 책에서 쭉 이야기한 것과 같이 좋아하는 분야에 일정 수준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면 누구나 기술적으로는 비슷한 출발선에 설 수 있다.


하지만 고만고만한 기술을 갖추었다고 해서 누구나 안정적인 프리랜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눈에 확 띄는 학력이나 경력, 남들보다 뛰어난 운, 생계걱정 없이 하고 싶은 일에 매진할 수 있는 타고난 경제력은 시작부터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게 해주는 자산이다. 그러나 한 인간을 프리랜서로서 차별화시켜 주는 밑바탕에 이렇게 불공평하거나 개인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기술은 물론이고 이러한 사기적 아이템을 하나도 장착하지 못한 채 프리랜서 세상의 문을 두드렸던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개인의 태도와 성격 또한 운과 경력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아니,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초반 시선 끌기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학력이나 언제 기울어도 이상하지 않은 운보다는 태도와 성격 같은 요소가 클라이언트에게 훨씬 더 깊은 인상을 심어 줄 수 있다.


너무 평범한 조언 아니냐고? 벌써 실망하면 안 된다. 지금부터 이어질 이야기는 이보다 훨씬 더 평범하니까. 가족과 지인들에게 하릴없이 백수 취급을 받던 프리랜서 지망생 시절, 나는 어떻게든 회사 밖에서 먹고살 길을 뚫어 보려고 주된 목표였던 번역 외에도 웹툰과 1인 출판, 문서 디자인을 포함하여 아주 조금이라도 돈이 될 만한 온갖 분야에 뛰어들었다. 이렇게 다양한 업계의 현실을 조금씩 체험하는 동안 내가 깨달은 가장 큰 교훈 중 하나는, 프리랜서에게 책임감과 인내심보다 중요한 자질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당연한 소리가 어디 있겠는가. 프리랜서에게 책임감과 인내심이 필요하다니, 까놓고 말해서 세상에 돈 받고 일하는 직업 중에 책임감과 인내심이 필요하지 않은 분야가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실제로 프리랜서 바닥에 머물고 있거나 프리랜서와 정기적인 업무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열에 아홉은 이 '당연한 소리'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세상에는 책임감과 인내심을 인정받는 프리랜서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심지어 나는 업계에서 수십 년 이상 잔뼈가 굵은 분들이 이 두 가지 요소를 두루 갖춘 프리랜서가 '매우 드물다'거나 '거의 없다'고 평하는 이야기마저 들었다. 다시 말해서, 헛웃음이 나올 만큼 당연해 보이는 이 자질들을 전쟁같은 프리랜서 세상에서 당신을 돋보이게 해 주고, 콧대 높은 클라이언트가 앞다퉈 당신을 찾게 만들 것이라는 말이다. 책임감과 인내심이란 자질은 부와 명예는 몰라도, 최소한 생계 걱정을 하지는 않도록 도와줄 마법의 열쇠다.


3개월 작업 일정으로 수백 페이지짜리 번역서를 계약해 놓고 두 달 반이 넘은 시점에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는 번역가, 잡지에 정기적으로 그림을 싣기로 해놓고 매번 마감일만 가까워지면 갑자기 중요한 경조사가 생기는 삽화가, 이미 선금까지 받은 상태에서 오류투성이의 코딩을 내놓는 개발자, 기본적인 틀조차 어긋나는 편집물을 내놓는 디자이너, 냉정한 프로의 세계에서 이 비슷한 이야기들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겠는가? 나 또한 업계의 일원으로서 이런 낯부끄러운 일들이 예외적인 사례이자 개인의 일탈이라고 주장하고 싶지만, 잠적한 번역가 때문에 또 애를 먹었다는 에이전시 담당자분의 하소연을 듣다 보면 이 바닥에 무책임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책임감을 갖춘 프리랜서, 혹은 프리랜서 지망생들에게 엄청난 기회가 열려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만약 당신이 마감을 성실히 지키며 맡은 작업을 성의 있게 해 낸다는 평판만 얻는다면, 당신은 업계를 막론하고 클라이언트의 섭외 1순위에 오를 것이다.


책임감이 프리랜서의 친구인 성수기를 빛내 줄 자질이라면, 인내심은 프리랜서의 피할 수 없는 적인 비수기를 버티고 극복하게 해 줄 자질이다. 제아무리 '잘나가는' 프리랜서라 하더라도 경력 초반에 일시적인 공백기 몇 번을 겪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버티는 놈이 이긴다'는 프리랜서 세계의 불문율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 공백기를 묵묵히 버텨 낼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물론 인내심을 발휘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나 같은 경우는 번뇌를 잊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며 몸을 바쁘게 움직이는 타입이지만, 개중에는 비수기를 기회 삼아 훌쩍 장기 여행을 다녀오거나 운동으로 체력을 쌓으며 다음번 성수기에 대비하는 대범하고 초연한 사람들도 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초조한 마음을 달래며 인내심을 갖고 버티는 것이다. 사실 프리랜서로서 내 경력은 이제 막 안정기에 접어든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와 함께 출발했던 이들 중 상당수는 벌써 공백기의 불안함을 견디지 못하고 포기를 선언했다. 분명한 것은, 그들 중에 기술적으로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도 많았다는 사실이다.


기술은 언제라도 배울 수 있지만 이런 자질들은 대학원에서도, 아카데미에서도, 에이전시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혹시 자신에게 프리랜서로 자리를 잡을 수 있을 만큼의 책임감과 인내심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면 지금 몸담고 있는 장소에서 스스로가 어떤 모습인지 돌아보면 된다. 당신은 회사, 학교, 혹은 가정에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인가? 늘 정해진 기한을 지키는가? 불편한 상황에서도 인내심을 발휘하는 편인가? 만약 이 세 가지 질문에 '네'라는 답이 나온다면, 당신에게는 프리랜서에 도전할 자질이 충분하다.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_ 서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