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수행

크게 꿈에서 깨어나게_ 서암스님

정정진 2017. 5. 6. 19:52



불붙은 감정을 정화하는 최상의 청량제


어두운 밤에는 아무리 후닥닥거려도 불을 밝히지 않는 이상 그 어둠이 물러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이 켜져 밝음이 오면 물러가지 말라고 해도 어둠은 물러갑니다. 마찬가지로 무엇인가 매우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끓이고 있을 때, 우리가 그것을 녹이고자 아무리 갖은 기교를 부리고 머리를 짜 봐야 통쾌하지 않습니다. 가라앉기는 커녕 대개는 점점 더 불이 붙지요. 이럴 때 방향을 달리 잡고 참선을 해야 됩니다.


경험을 해 보면 아시겠지만 참선을 하면, 불을 켰을 때 어둠이 물러가듯이 우리 마음 속에 들끓던 온갖 어지러움이 삽시간에 물러갑니다. 모든 것을 판단할 때 감정이 개입되면 그것은 언제나 실패작이 되기 쉬운데, 참선을 하면 그 찰나에 깨끗하게 감정이 녹아버리고 이성을 찾게 되니까요. 이렇게 이성을 찾고 감정에 끄달리지 않을 때 생활에서 부딪치는 모든 어려움을 원만히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감정에 붙은 불을 끄는 데 참선보다 더 좋은 청량제는 없습니다. 그런데 감정이란 처음 한 번 일어날 때는 대개 그 강도가 높지 않습니다. 조금 찌그럭 찌그럭 하는 정도로 시작되지요. 그러다가 그것이 쌓여서 심하게 감정이 복받치고 불이 탈 때는 앞뒤 생각이 다 끊어져 버립니다. 이렇게 한 번 앞이 깜깜해지도록 감정에 사로잡히고 급기야 칼부림이 일어날 정도까지 되면 평소에는 양같이 순하던 사람조차 죽는 것도 모르고 난리를 부리게 되지요.


사람이 살다 서로 부딪치고 또 칼부림이 나서 사람을 해치는 이치가 이런 까닭에 사람이 꼭 악해서 남을 해치는 것만은 아닙니다. 자기 감정에 복받쳐서 불붙는 그 시간을 못 넘기고 앞뒤 이성이 끊어져 버리니 그런 사고를 저지르게 되지요. 그렇다고 나중에 후회해 봐야 벌써 엎질러진 물이지요.


이것이 바로 탐진치 삼독의 작용입니다. 삼독에 끄달려 폭발하는 감정을 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사고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잠깐 동안이라도 참선을 하면 그 감정은 금방 녹아버립니다. 이렇게 모든 감정이 가라 앉고 정상적으로 돌아설 때 행복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탐진치가 치성해서는 자꾸만 막혀 행복의 길로 나아갈 수 없지요.


부모가 낳기 이전. 나는 어디서 왔던고


올바른 정신생활을 유지하여 행복의 길로 나아가려면 평소에 꾸준히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맑은 정신으로 딱 '이뭣고' '내 이 몸뚱이가 어디서 왔느냐'하고 화두를 잡는 겁니다.


간단히 생각해 보면 내 부모가 낳아 준 것이지요. 그러나 '부모가 날 낳아 주기 전에 나는 어디서 왔던고' 하면 꽉 막히지요. 그래서 몸 받기 전의 본래면목을 말해 보라면 이론으로 여러 가지 답변을 하지만 그것은 부모에게 받은 몸을 가지고 달다 쓰다 하여 재고 따진 것일 뿐입니다. 그 따지는 것을 그만두고 진정 이 몸 생기기 이전의 자기 본래면목을 한 번 말해 보라고 하면 끝내는 '모르겠다'는 정직한 말이 나오게 됩니다.


지금 부모에게서 받은 몸을 가지고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지만 아무리 따져 봐야 100년 밖에 못 따집니다. 아무리 해 봐야 100년 동안 재고 따지는 한바탕 꿈일 뿐이지요. 그러니까 100년 인생에 하룻밤 꿈밖에 못 따진다는 말이 있지요.


그러나 우리가 이 100년 안쪽의 세계에 안목이 매여 산다면 얼마나 비참하고 한심한 인생이 되겠습니까? 우리의 생명은 영원한 것입니다. 어느 누가 만든 것도 아니고,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 우리 생명입니다. 부모라 해도 이 몸뚱이, 고깃덩어리만 낳아 줬지 정신까지 낳아 준 것은 아니거든요. 이 한 물건은 나고 죽는데 아무런 간섭이 없는 물건이요, 그 정체는 바로 눈 앞에 분명한 자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양이 있어야 파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양이 있는 몸뚱이는 파괴되고 부서지기도 하지만 그 자리는 모양이 없는 자리거든요. 그러니 불생불멸이지요. 예를 들어 '손을 드시오'하면 손이 머리 위로 올라가는데, 이때 손이라는 것은 손가락이 5개 붙은 물건으로 모양이 있지만 손을 들게 하는 그 놈은 모양 있는 놈이 아니잖아요?


손은 모양이 있지만 이것을 들게 하는 놈은 모양도 빛도 냄새도 없는데 바로 그 놈이 들어라 하면 들고 내려라 하면 내립니다. 그것은 빛도 색도 없는 물건이라 누가 훔쳐 갈 수도 없고 누구에게 피해를 끼칠 수도 없고 누가 어떻게 해 볼 수도 없는 자리입니다.


'취부득 사부득'이라, 어떻게 취해 볼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허공과도 같지요. '허공' 그 놈은 형태가 없으니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습니다. 허공을 칼로 그은들 허공이 상처입을 턱이 없고 불에 그슬린들 허공이 불에 그슬리지 않지요. 우리의 마음도 이와 같이 형태가 없습니다. 그러니 누가 훔쳐 갈 수도 없고 피해를 끼칠 수도 없는 보배이지요.


하나의 등불로 천하를 밝히는 법


그런 보배를 가지고도 항상 피해를 입는 것이 바로 중생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조금만 선생활을 하여 그것을 각성하면 어떠한 피해도 입지 않고, 사는 것이 항상 명랑하고 여유 있으니 초조나 불안이 사라집니다. 하지만 그러한 정신세계, 영원의 세계를 등지고 코 앞의 100년 인생을 따지고 타산하며 지내는 것이 중생입니다.


'내가 한 것보다 네가 보답을 적게 한다' 혹은 '내 것을 네가 빼앗았으니 가만두지 않겠다'는 등 이런 온갖 생각들로 사회가 가득찼으니 불평이 그칠 사이가 없습니다. 조금만 차원을 높이면 얼마든지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세계가 열립니다.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게 바로 그 자리인데 한 생각 잘못 돌려 지옥세계를 여는 것입니다.


불교처럼 쉬운 진리는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한 생각 돌리지 못해서 그렇지 거기에 무슨 관문이나 어려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우리가 안해서 그렇지 누구나 하면 다 됩니다. 부처님이라고 안되는 것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않고 모두 삿된 길에 더 귀를 기울이고, 진정 당당한 이 길을 스스로 외면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길 뿐이지요.


그러니 우리 모두 등불이 되어서 스스로 참선을 하고 사회를 밝히는 포교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이 나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혼몽한 꿈을 깰 수가 있습니다. 등불 하나가 천하를 다 밝힐 수 있듯이 우리가 부처님의 등불을 하나 켬으로 해서 이 세상의 혼란과 어지러운 거리를 밝힐 수 있거든요.


손바닥 뒤집듯 한 생각을 돌려보게


다시 말하지만 불교는 아주 쉬운 것입니다. 무슨 재료를 갖고 하는 것도 아니고, 빛도 냄새도 형태도 없는 이 마음을 어느 방향으로 기울이느냐 하는데서 우리 인생이 180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무슨 밑천이 드는 것도 아니고 기교가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한 생각 돌이키면 됩니다.


쉽게 생각하면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을 몸으로 옮기자면 다 옮길 수 있을 것도 같지요? 그런데 그 생각이 일어나는 근거가 있습니까? 뿌리가 없지요? 우리가 기쁜 생각을 내든지 슬픈 생각을 내든지 혹은 미워하는 생각을 내든지 사랑하는 생각을 내든지 시기 질투하는 생각을 내든지 그 온갖 생각을 내는 그 자리를 조금만 돌이켜 보면 사실 뿌리가 없거든요.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 뿌리 박고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화를 몹시 낼 때도 돌이켜 보면 화를 낸 뿌리가 없습니다. 그 없는 것에 스스로 속은 것이지요. 그런데 칼부림이 나고 온갖 사건을 저지르게 되니 참 딱한 일이지요. 이렇듯 뿌리 없는 온갖 생각으로 온갖 사건을 만드는 것이 중생입니다.


그러나 뿌리 없는 본래 그 자리로 돌아가면 항상 평온하고 너그럽게 됩니다. 사실 탐심도 우리 마음이요, 진심도 우리 마음이요, 치심도 우리 마음이요, 모두가 다 우리 마음인 것입니다. 탐진치를 떠나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마음이 부처입니다.


그러니까 부처 되는 마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얼음이나 안개나 우박이나 눈이나 다 물이지 물 아닌 것이 없습니다. 또 금가락지나 금술잔이나 금비녀나 다 금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도 악한 마음이나 선한 마음이나 다 부처 마음입니다. 얼음이나 눈이 다 물이듯이 금가락지나 금비녀가 다 금이듯이 우리의 마음도 부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금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가락지라는 형상에 팔리고 비녀라는 형상에 팔려서 그 본래의 원리를 알지 못하듯 본래 부처인 마음을 보지 못합니다. 이렇게 진정한 우리 마음의 근본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진심에 매달리고 탐심에 매달려 그 껍데기 마음만 보고 변함 없는 부처 자리는 못보고 있지요.


그러나 진실로 탐심 떼어놓고, 진심 떼어놓고, 치심 떼어놓고 부처 되는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탐심을 바로 세우면 부처요, 탐심에 끌려가면 중생입니다.


'생각을 깨달으면 중생이 바로 부처이요, 생각이 미혹하면 부처가 바로 중생이라' 했습니다. 그러니 부처의 세계 따로 있고 중생의 세계에 한 치의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한 생각 돌리면 됩니다. 손바닥 엎고 젖히듯이 그 한 생각 돌리는 데서 중생과 부처의 차별이 생깁니다.


이렇게 어느 마음이나 다 부처인 것을 우리가 왜 부처의 마음을 쓰지 못하고 중생의 마음을 쓰는가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크게 꿈깨라'는 뜻의 불교


불교는 신앙의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의 종교입니다. 불교라는 말 자체의 의미가 '대각' '크게 꿈깨라'는 뜻입니다. 꿈만 해도 좋은 꿈, 언짢은 꿈 등 온갖 꿈을 다 꿉니다. 조신의 꿈에서는 경쇠소리 '땡'할 때 꾼 꿈에서 아들 딸 삼 남매 낳고 젊은 사람이 머리가 세도록 한평생 살았는데 꿈을 깨고 보니 자기가 경쇠 친 소리의 여운이 아직도 다 안그치고 남아 있었다고 그랬거든요. 이렇게 삽시간에 몇 해씩 사는 꿈을 꾸기도 합니다.


꿈을 안 꿔 본 사람은 없을테니 다 경험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정진을 맹렬히 하면 꿈이 없어집니다. 정진을 좀 하면 깨어 있거나 꿈꿀 때가 둘이 아닙니다. 정진을 하지 않을 때 꿈의 경계를 따라가 보면 그 경계가 막힙니다. 그래서 자기 꿈의 경계를 살펴보면 수행 정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맑은 꿈이나 좋은 꿈을 꾸면 정신이 맑은 상태이고 혼미하게 끌리는 꿈을 꾼다면 그만큼 정신이 맑지 못하다는 증거지요. 좋은 꿈이든 언짢은 꿈이든 어찌됐든 한바탕 꿈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꿈이란 것이 거짓이요, 허깨비이거든요. 꿈에 일확천금을 얻었거나 고관대작이 되었더라도 깨고 나면 어떤가요? 아무리 찾아 봐도 돈덩이나 감투는 없지요? 그러나 꿈꿀 때는 그 속에서 감투 쓰고 돈 많으면 우쭐대고 기분이 좋기는 좋습니다. 그런데 깨고 보면 어디 있습니까? 그냥 한바탕 꿈이지요. 그렇듯 온갖 꿈의 경계는 사라지지만 꿈의 주인공은 꿈꿀 때나 깨고 난 지금이나 내내 조금도 안변했어요. 그것이 하룻밤 꿈이든 몇 년이든 백 년 인생을 살아도 그 백 년이 다 꿈입니다.


자기 인생의 문제를 '꼭' 해결하자


꿈이 바뀌듯이 몸이 바뀔 때마다 자기의 세계가 다르게 펼쳐지지만 그래도 그 주인공은 불생불멸로 항상 따라다닙니다. 이 주인공을 깨닫지 못하면 영원히 희미한 것이고, 한 생각 깨달으면 영원히 깨달은 세계가 있는 것이니, 생사의 거래가 없는 그것을 찾자는 것이 참선이지요.


그것은 어려운 것도 아니고 한 생각 돌이키면 되는 것입니다. 수억 만년을 매여 있었더라도 한 찰나에 한 생각 돌이켜 부처가 되는 것이니 부처라는 것이 머리 하나 더 있고 눈 하나 더 달린 그런 신통 변화를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경계의 그물을 끊어버리고 해탈자재해서 조금도 구애받지 않는 그 생활이 부처이지, 무슨 신통 변화를 부린다고 부처가 압니다. 또 신통 변화를 부려 봤자 며칠이나 가겠어요?


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천하를 얻어 봐야 아무 소용이 없고 온갖 신통력을 얻어 봐야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불교의 위대한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신통만 있으면 그것을 과시하고 또 이 세상 사람들도 신통만 보면 거기에 따라가지만 불교는 그런 문제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을 해결하고자 하는 종교입니다.


이렇게 어떠한 것에도 사로 잡히지 않고 영원히 생사에 끌리지 않고 오매가 일여한 자기를 보고자 하는 것이 불교임을 알아 늘 깨어 있는 삶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위대한 자기의 발견_ 서암 큰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