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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울좋은 복지국가체제_ 김종철

정정진 2009. 4. 18. 19:42

야생의 삶의 기술

 

선거철마다 되풀이되는 일이지만, 한국의 정치가와 그들의 조언자들이 내놓는 정책 공약들이,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경제성장 논리에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씁쓸하다. 이번에는 심지어 "시대정신은

경제다" 라는 말이 되지도 않는 정치적 구호까지 등장하였다. 고용문제를 포함한 온갖 사회적, 인간적 고통들이 난마처럼

얽혀 있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사람들이 이 모든 문제의 해답을 쉽게 '돈 문제'로 환원시켜, 경제제일주의 논리에 빠지는

것은 물론 이해할 수 없는 게 아니다.

 

하지만 지금 겪고 있는 대부분의 고통이 본질적으로 경제성장 논리에 의해 비롯된 것임을 우리는 분명히 직시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가난'은 엄밀한 의미에서 '근대화된 빈곤'이기 쉽다. 즉, 그것은 경제발전 혹은 개발

과정에서 뿌리뽑히고, 고립되고, 원자화된 삶에 수반된 고통이며, 성장의 필연적인 소산인 사회적 양극화, 불평등, 좌절,

실패에 기인하는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풀뿌리 공동체에서 가난은 견딜 수 없는 비참한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공생공락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선거에 임하는 모든 정치세력이 성장논리를 앞세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실현성 여부와는 별개로 지금 성장 못지않게

분배에 관해서 말하고, 국가적 복지체제의 확립에 관해서 말하는 정치세력이 상당수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른바

신자유주의라는 극단적인 약육강식의 경제논리의 지배 하에서 약화일로에 있는 국가의 공공성을 회복하고, 약자들을 보호

할 수 있는 국가의 기능을 신장시켜야 한다는 것은 나무랄 데 없는 주장으로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

은 복지국가체제란 기본적으로 계속적인 성장을 전제로 하지 않을 수 없는 체제이며, 나아가서는 자연과 인간과 사회에 대한

끝없는 공격을 그 내재적인 원리로 하고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확대와 연장에 기여할 수밖에 없는 체제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관점에서도 복지국가체제는 근본적으로 의심스러운 체제이다. 복지국가에서 사람들은 국가권력에

의해 '제도적인 보살핌'을 받는 '국민'이라는 피동적인 객체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서 '사회안전망'을

필요로 하고,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위해서 무료로 교육을 받고, 무상의료의 혜택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는 오늘날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제공되는 교육체제와 의료체제가 궁극적으로 과연 무엇을 위한

체제인지, 좀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따져보면, 풀뿌리 민중의 자립, 자치, 자급의 능력을 훼손하고, 그럼으로써 인간의 자유롭고 주체적인 정신의 힘을 약화시킨

다는 점에서 복지국가가 해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자본과 국가권력이 결합돼 거대 시스템의 지배 밑에서 오늘날

우리의 삶은 갈수록 비소해지고, 인간정신은 갈수록 쇠약해지고 있다. 우리가 정말 민주주의와 자유로운 삶에 관심이 있다면

우리는 '우애와 환대'의 공동체를 조금이라도 넓혀가는 일에 헌신하는 수밖에 없다. 진보와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야생의 토착

적 문화를 뿌리로부터 소멸시키는 '사막화'의 추세를 더이상 허용해서는 안된다. (2007년)

 

- 김종철의 <땅의 옹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