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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포르노그래피_ 로버트 쉬어

정정진 2010. 6. 27. 09:29

 

'부당한 영향력'을 경고한 아이젠하워

 

 

민주주의가 작동하려면 규모가 작아야 한다. 미국에서 민주주의라는 대담한 실험을 벌인 건국의 주역들이 전체보다 부분을 중시하고

개인의 권한을 침해하지 않으며 국가의 역할을 엄격하게 제한한 것은 이 때문이다. 국가의 권력은 국민이 국가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까지 대폭 축소되었다. 미국의 주州 들은 공공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의사 결정 권한을 연방에 양도하는 것도 못마땅해

했다. 헌법 초안에는 연방에 대한 의심이 보편적이고도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었기 때문에 최종안이 나오기까지는 권리장전이 필요없

을 정도였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건국의 주역들이 공화국과 제국을 모순 개념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냉전 시대가 되자 사람들은 이

중요한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한 가지 이유는 미국이 여느 제국과 달리 타국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며 야심을 드러내지는 않

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언제나 침략 행위를 방어로 포장했다. 2차 세계대전 때 떨어뜨린 폭탄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폭탄을 작은

나라 베트남에 떨어뜨려(이 학살극의 막을 연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에 따르면) 340만 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것도 방어 행위로

둔갑했다(2차 세계대전은 '전쟁부' 소관이었지만 베트남전쟁을 치른 것은 '국방부' 였다). 지난 50년 동안 미국이 벌인 군사 행위가 다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망상과 불안, 탐욕을 드러내기보다는 다른 나라를 해방시킨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물론 모둔 제국은 다른 나라를 집어삼키는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 자유, 침략에 대한 저항, 문화 수출 따위를 들먹였다. 국가가

수행하는 이런 요소가 들어가게 마련이다. 하지만 미국은 국내의 비판을 모면하기 위해 - 외국의 비판까지 잠재울 수는 없었지만 - 자

국의 이익이 아니라 타국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핑계를 댔다. 물론 그럴 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극도로 모순되고 다른 나라를 착취

하기까지 하는 외교정책에 대한 변명거리는 되지 않는다.

 

하지만 논리와 사실이 모순되는 정책에 대해 자국민의 정치적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는 효과가 있다. 위싱턴이 경고했듯, 국가가 현실의

적과 가상의 적에게 위협받을 때는 "애국주의를 가장한 사기 행각" 을 폭로하기가 아주 어렵다. 위싱턴은 미국이 매스미디어 사회로

바뀌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정부가 선전을 강제로 주입하고 국가 안보라는 베일로 불편한 진실을 가려버리는 사회 말이다. 냉전이

시작된 이후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영구적인 전시 태세가 일상이 되어버린 현대 군사주의 국가도 예측하지 못했으리라.

 

이런 이유로, 나는 위대한 장군 출신 대통령 드와이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의 퇴임 성명으로 워싱턴의 고별 연설을 보완해야 했다.

아이젠하워의 고별 연설은 워싱턴의 연설과 완벽하게 짝을 이룬다. 미국 초대 대통령의 두려움이 현실로 바뀌었음을 현대의 아이젠하

워가 경고한 '군산복합체'는 전세계에 전진 기지를 배치한다는 제국주의적 발상과 미국이 모든 나라 일에 개입하겠다는 뻔뻔스러운 사

고방식의 필연적 결과일 뿐이었다.

 

아이젠하워가 가장 경악한 것은 공산주의라는 적이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에 대항하기 위해 성장한 체계가 국방의 임무를 저버

린채 자기 스스로 증식하는 현상이었다. 아이젠하워는 다가올 일을 정확히 예견했다. 소련이 무너지면서 냉전의 근거도 사라졌지만 군

산복합체는 곧 테러라는 또 다른 적을 찾아냈다. 2008년 연방 예산을 보면 아이젠하워가 얼마나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2170억 달러에 달하는 국방비 지출액은 연방 정부의 나머지 모든 부처에서 쓰는 재량 예산 규모를 넘어선다.

 

아이젠하워는 이렇게 경고했다.

 

" 오늘날 미국의 군사 기구는 평화롭던 과거에 알고 있던 것과 전혀 다릅니다. 심지어 2차 세계대전이나 한국전쟁에서 싸울 때와도 같

지 않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에는 군수산업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미국 제조업체들은 평상시에는 보습을 만들다가 필요할

때면 칼을 생산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국방을 임기웅변에 맡길 수 없기 때문에 엄청난 규모의 영구적인 군수산업이 생겼습니다...

 

미국 역사상 거대한 군사 체제와 대형 군수산업이 결합한 예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로 인한 총체적 영향 - 경제적, 정치적, 심지어

정신적 영향 - 이 모든 도시, 모든 주, 연방 정부 내 모든 부처에 파다합니다. 이런 발전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담긴 중요한 의미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정부 위원회는 군산복합체의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부당한 영향력에 맞서야 합니다. 제자리를 벗어난 권력은 비대해져 재앙을 일

으킬 가능성이 상존합니다. 우리는 이 결합의 무게가 우리의 자유와 민주적 절차를 짓누르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거대한 군산복합체가 우리의 평화로운 수단 및 목표와 어우러지게 하려면 국민이 경계를 늦추지 않고 지식을

갖추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안보와 자유를 함께 향상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

 

이제 경고를 들은 적이 없다는 말은 못할 것이다. 아이젠하워가 "부당한 영향력"을 경고한 것은 미국의 맞수가 미국에 맞먹는 무기를

보유하고 있을 때였다. 아이젠하워는 열띤 첨단 무기 경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이 경고를 보낸 것이다. 그러니 소련 같은 적도 없으면서

터무니없이 많은 국방비를 지출하는 지금 상황에서 정치인과 언론이 경고를 보내지 않는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9.11 이후 미국이 갖춘 무기가 테러 방지와 무관하다는 사실에서 군산복합체의 "부당한 영향력" 에 대한 아이젠하워의 경고를 더욱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래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군산복합체의 세력 기반이 모순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보았듯, 군사

기구가 요구하는 무기들은 당면한 임무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로비스트와 정치인이 어떻게 태연한 얼굴로 이런 무기를 들먹이는

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보트도 없는 테러리스트를 상대하겠다며 25억 달러짜리 잠수함을 요청한 리머번 상원의원처럼 말이다.

이런 자들은 언젠가는 자신의 뜻을 관철할 것이고 로비 자금으로 정계와  학계의 지지를 살 것이다. 하지만 우리도 더는 참을 수 없다.

'불량 국가'를 내세워 위기를 조장하고 '테러리스트'의 단결력과 세력을 끊임없이 과장하는 짓거리도 이제는 먹히지 않을 것이다. 중국

과 러시아의 위협을 들먹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두 나라는 미국이 벌이는 전쟁 놀음에서 꼭두각시 노릇을 하기보다는 시장에서 경쟁을

벌이는 데 치중하고 있으니 말이다.

 

 

* 로버트 쉬어 : LA타임스 전직 기자, 베트남 특파원, 블로그 '트루스디그' 편집장

 

- 로버트 쉬어의 <권력의 포르노그래피>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