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 일에 가장 도움이 되었던 책 읽기_ 김웅
아이들이 그보다 더 싫어하는 말은 검사 일에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이 무엇이냐에 대한 답이다. 아예 경기를 일으킨다. 백발백중 "에이" 하는 실망스런 탄성과 함께 분노를 유발하게 하는 그 답은 바로 '책 읽기'다. 물론 이 발언은 경험적으로 볼 때 매우 위험하다. 일단 너무 식상하다. 세상을 오래 살지 않았어도 책을 읽으라는 얘기는 머리카락 수만큼 많이 들어왔을 것이다. (중략)
하지만 '책 읽기'라는 대답은 아이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참석한 학부모나 교사들로부터 열화와 같은 공감을 얻는다. 어차피 강사를 선정하는 것은 분노한 학생들이 아니라 교사들이다. 마치 분유 광고와 같다. 분유를 먹는 것은 아기들이지만 사는 것은 엄마들이다.
그러고 보니 책 읽기가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제대로 설명해본 적이 없다. 대개 강연이 끝나는 시점에 질문을 받기 때문에 제대로 설명을 못했고 그러다 보니 무성의한 강사로 남게 된 것이다. 모두가 알 듯 현실은 인터넷이나 방송, 영상 등에서 나온 것과 다르다. 인터넷, 방송 등은 대부분 의도된 현상만 보여준다. 현상만 보여주면 별 문제가 없을 텐데, 굳이 더 나아가 현상에 대한 근시안적인 분석과 감정적인 마녀사냥만으로 끝을 맺는다. 인터넷이나 방송은 현실의 일부분만을 고려해 뽑아낸 이미지를 꺼내 들고 왜곡된 사실과 결론을 강요하곤 한다. 그러다 보니 그러한 매체에 노출된 사람들은 자신이 많은 정보를 축적했다고 착각하기 쉽고, 또 은밀히 강요된 결론을 자신의 이성적 사고의 결과로 오해하기 쉽다. 아는 것도 많고 세상을 보는 눈도 가졌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비만 오면 풍년인 줄 아는 서울 놈 꼴이라 할 수 있다. 지루하고 단편적인 사고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단편적인 사고를 하느라 활용하지 않고 아껴둔 머리는 편 가르기를 하거나 누군가를 지독히 미워하는 쪽으로 사용된다.
엘빈 토플러는 세상이 복잡해지고 정보가 폭증하면 그것들을 미처 분석하지 못한 채 자신을 방어하고 자신의 편견을 강화하는 정보들만 선택하여 세상을 단순하게 볼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이런 상황을 '정보과부하'라고 표현했다. 인터넷은 대표적인 정보과부하의 세상이다.
집단지성이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해결해줄 것이라고 믿으며 소셜 미디어를 신봉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사람들은 통제력과 이해력이 떨어질수록, 무언가 믿을 구석을 찾아 매달리게 마련이다. 오늘날에는 소셜 미디어가 그 믿을 구석이 되고 있다. 소셜 미디어는 실제와 달리 뉴스가 선정적이고 획기적인 것처럼 보이도록 거대한 압력을 가하면서 뉴스를 더욱더 상품화했다. 소셜 미디어의 '투명성'은 말만 투명성일 뿐이며, 본질적으로 구원과는 불화를 이룬다. 사용자들은 피해자가 언제까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있기만을 바란다. 이론상 소셜 미디어는 대화와 갈등 해결을 장려하나 실제로는 전쟁을 조장한다." 에릭 데젠홀의 말이다.
모든 현상에는 이면과 원인이 있다. 대개 여러 개의 원인들이 경합하며, 그것들이 화학적인 결합을 하여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현상에서 원인을 찾아내는 것은 인터넷 댓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원인을 찾아내는 능력이 아니라, 원인을 찾기 위해서는 무척 어려운 과학적 추론이 필요하며 자신은 그것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실패에 대한 인식이다. 원인을 찾아내는 것보다 자신이 틀릴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말은 정말 받아들이기 어렵고 대부분 사람을 무시한다는 반감만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죽었다.
현상을 벗어나 그 뒤에 있는 이면에 대한 인식과 고민을 하게 해주는 것은 다양한 경험이다. 기 드보르가 말하길 직접경험은 '소외 또는 분리 이전의 총체성을 회복시켜주는 삶과의 직접적인 만남'이라고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경험해볼 수는 없다. 따라서 간접경험을 통해 그러한 능력을 키우는 것이 현실적인 답이다. 간접경험을 가장 깊이 할 수 있는 것이 책 읽기다. 인터넷이나 영상으로 접하는 정보가 목적지향적인 1차원적 강요라면 책으로 접하는 경험은 3차원적인 단일성의 회복이다. 책 읽기를 통해 습득한 인식과 고민은 때로는 유연성으로, 때로는 냉철함으로 작용한다. 검사 일이 대부분 활자로 된 정보를 바탕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라 책 읽기를 통해 익힌 이해력, 어휘력, 상상력, 비판 의식, 사실 파악능력 등은 사건의 분석, 해석, 평가에 직접적으로 활용 가능한 능력들이다. 내 경험으로는 단편소설이 가장 효율적인 수단인 것 같다.
이런 나름의 깊은 고민 끝에 말한 것이 책 읽기라는 것을, 이 자리를 빌려, 내 강의에서 무성의함을 느꼈다는 그 학생 녀석에게 꼭 알려주고 싶다. (중략)
두 번째 사교육은 속독법이었다. 나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다가 더 많은 책을 더 빨리 읽고 싶다는 욕망에 빠져 덜컥 속독법이란 것을 배웠다. 그것 역시 웅변학원 못지않은 치명적인 후유증을 남겼다. 속독법이란 결국 책 한 페이지를 눈으로 찍어 눈에 띄는 글자들로 대강의 내용을 추측하는 것이다. 나는 강사 자격증까지 딸 정도로 너무 열심히 속독법을 익힌 나머지 독서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주화입마에 빠진 것이다. 10분 만에 책을 읽을 수 있었지만 도대체 재미가 없었다. 그때는 글이 하나하나 곱씹어야 '게미'가 나는 나물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몰랐다. 가령 '마담 보바리'를 보면 보바리 부인이 창밖을 보는 장면에 대한 묘사가 두 쪽을 넘어간다. 그 묘사를 하나씩 따라가야만 보바리 부인의 헛헛한 마음과 설렘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게 없으면 보바리 부인은 그냥 드라마 시리즈 <사랑과 전쟁>의 주인공일 뿐이다. 속독법으로 인해 정독을 못하게 되자 그런 재미를 잃어버렸고 금세 책은 내 곁을 떠났다. 다시 책을 읽기 위해서는 속독법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고육지책이 메모를 하면서 책을 읽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글을 읽을 때 늘 A4 이면지를 반으로 접어 메모를 하면서 읽는다. 사교육은 이렇게 위험하다.
나이 먹어서 읽는 책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지금도 꾸준히 읽는 편이지만 마치 철새 같다. 내 것인 것 같지만 내 것이 아니다. 게다가 생각이 아집으로 굳어버려 그에 맞는 책이 아니면 불편해진다. 이해가 안 되는 책이 대부분이고 그럴 때면 늘 번역 탓을 하며 겸손과 교양이 들어가야 할 자리를 비난으로 메워버린다. 무엇보다 이제는 책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많아졌다.
온통 나를 즐겁게 해주기 위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 세상이다. '피로사회'를 쓴 한병철 교수는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깊은 주의가 '과잉주의'에 밀리고 있다고 했다. 심심함을 참지 못하여 저 깊은 심심함을 허용하지 못하고 있는데, 실상 그것이야말로 창조적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했다.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으로, 이러한 이완이 소멸되면 그와 함께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이 소실되고, 그에 따라 '귀 기울여 듣는 자의 공동체'도 사라진다고 했다. 재미있는 것에 둘러싸이면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이 필수인 검사 생활도 어려워진다.
검사내전_ 김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