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존재가치에 눈 뜬 삶은 복되다_ 도법스님
지난 시간에 잠깐 설명한 것처럼 지금 여기에 있는 나라고 하는 존재의 가치는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입니다. 불교 언어로 표현하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고, '본래부처'인 것이지요. 이 세상에서 최고일 뿐 아니라, 온 우주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최고의 존재라는 말입니다. 이런 것을 '무가보' 즉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라고 합니다. 너무나 대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생명을 갖고 살아가는 '나'라는 존재의 가치가 그렇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대단합니다. 언설로는 그 가치를 제대로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전에서 신기하다, 불가사의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의 가치를 모르고 삽니다. 반면 부처님은 우리와는 달리 그것을 확신하고 사셨습니다. 가격을 매길 수 없는 대단히 귀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삶이 어떻겠습니까? 자신의 삶에 만족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대중 : 만족합니다) 자부심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대중 : 있습니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으면 복입니까, 아닙니까? (대중 : 복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존재가치를 제대로 알고, 제대로 확신함으로써 존재하는 그 자체로 무한한 만족을 느끼고,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며 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지혜와 복덕이 원만구족한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우리는 존재의 실상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무한한 만족과 자부심의 삶을 잃게 되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큰 손실입니까. 원만구족한 자신의 실상이 본래부처인데, 그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계속 자기 밖의 어딘가에 더 좋은 무엇이 있을 거라는 무지와 착각으로 계속 구걸하고 있는 셈이지요. 이런 삶을 '법화경'이나 선사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자기에게 무궁무진한 보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또는 부처님께 구걸하는 거지 노릇을 하고 있다." 라고.
자기 존재의 실상을 사실대로 잘 아는 일, 자기의 존재가치에 눈 뜨는 일이야말로 진정 복과 덕을 원만하게 구족하는 일입니다. (중략)
내가 하는 만큼 부처가 된다
제가 보현행원을 이야기하면서, 보현행원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본래부처'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늘상 말씀드렸고, 또 본래부처에 대한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이해와 확신을 돕기 위해서 눈으로 보고 생각할 수 있는 인드라망 무늬를 제시했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보현행원은 깨달음을 향해 가는 중생의 수행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본래부처의 행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과 마음을 다하여 보현행을 하면 실천한 만큼 그대로 부처입니다. 그러므로 부처의 삶을 살고자 하는 불자라면 반드시 보현행을 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본인이 하겠다고 마음먹고 하면, 하는 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간 존재라면 본인이 마음먹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대로 삶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한 자루의 칼이 내 손에 주어진 것과 같아요. 손에 쥔 한 자루의 칼을 어떻게 쓸 것인지는 온전히 내 마음에 달려 있지 않습니까. 사람을 살리는 데 쓸 수도 있고, 사람을 해치는 데 쓸 수도 있는 거지요. 예를 들어 의사에게 칼이 주어진다면 병든 환자를 고치는 훌륭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반면 강도에게 칼이 주어진다면 어떻겠습니까? 우리를 공포에 몰아넣거나 생명을 위협하는 흉기가 되겠지요.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가치가 달라지는 칼처럼 지금 나라는 존재도 모든 가능성이 갖추어져 있다는 말이 바로 '본래부처'입니다. 내가 도둑놈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바로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대로 도둑놈 인생이 창조됩니다. 하지만 내가 부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만큼 부처의 삶이 창조됩니다. 보현행이 본래부처행이므로, 보현행원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그대로 부처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백에서 십만큼 하면 십만큼 부처의 삶이 이루어지고, 오십만큼 하면 오십만큼 부처의 삶이 이루어지고, 백만큼 하면 백만큼 부처의 삶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이렇게 알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 말고 수행이 따로 없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 말고 부처의 삶도 따로 없다고 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법문을 청하는 일. "법의 수레바퀴를 계속 굴려주십시오." 하고 청하는 실천을 하는 것인데,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공부할 내용입니다. (중략)
인생은 도깨비 방망이
오늘 공부할 내용은 보현십대행원의 일곱 번째 청불주세원 즉 "열반에 들지 마시고 우리 곁에 항상 머물러 주시기를 부처님께 간청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입니다. 본래부처의 세계관인 인드라망 논리로 바꾸면 "모든 인드라망 존재들께 항상 우리 곁에 안정적으로 머물러 주시길 간청하는 삶을 살겠습니다."가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 삶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 다시 말하면 나는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야 고통으로부터 해탈하여 열반의 삶을 살 수 있을까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인생 제일의 화두에 부처님이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부처님은 "인생이란 나에게 주어진 도깨비 방망이나 여의주와 같다."고 했습니다. 도깨비 방망이나 여의주나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이뤄 줍니다. 부처님은 "네 인생은 도깨비 방망이와 같고 여의주와 같기 때문에, 네가 의도한 대로 네가 쓰는 대로 뜻한바 삶이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불교란 복잡하고 어렵고 애매모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단순명료합니다. 웃는 인생을 살겠다고 마음먹고 그런 행위를 하면 저절로 웃는 인생이 됩니다. 웃는 인생을 살고 싶으면 웃는 노력을 하면 됩니다. 어떤 상황이 와도 동요하거나 위축되지 않고 웃는 노력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그런 조건들을 가꾸어 보세요. 아무리 안 좋은 상황이나 기분 나쁜 상황이 와도 본인 스스로 작심하고 웃는 인생을 살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인생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방해할 사람도 없습니다. 인생이란 대단히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인생의 진면목을 잘 모르다 보니 나에게 주어진 내 인생을 제대로 못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상황이나 남 핑계를 대기 일쑤죠. 물론 살다 보면 어떤 상황이나 사람이 내 앞을 막고 있다고 느껴질 때도 없지 않아 있지요. 하지만 실제 내용을 면밀하게 따져 보면 대부분 나에게 주어진 도깨비 방망이에 대한 이해와 확신, 그리고 그 방망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한 결과일 때가 많습니다. 어쨌든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웃는 인생으로 살아가려는 의지와 신념으로 노력을 하면 틀림없이 밝고 활기찬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삶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부처님처럼 살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지금 당장 작심하고 부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됩니다. 혼신의 힘을 기울여서 그렇게 하십시오. 노력한 만큼 결과가 바로바로 나타납니다. 부처님은 늘상 "인생이란 도깨비 방망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 주체적인 의도를 갖고 네 인생을 만들어 가라. 그러면 네가 살고 싶은 삶이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당신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 나에게 한 뭉치 광목천이 있습니다. 내 손에 쥐어진 광목천이라는 물건을 내가 방 닦는 데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쓰면 그 천은 반드시 저절로 걸레가 됩니다. 이와 달리 얼굴을 닦아야 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쓰면 그 천은 틀림없이 저절로 수건이 되겠죠. 내 인생도 내게 주어진 한 뭉치 광목천과 같습니다. 부처님은 스스로에게 주어진 인생을 중생이 되도록 쓰지 말고 부처가 되도록 쓰라고 하셨습니다.
내 인생을 부처로 쓰는 길을 초기불교에서는 '팔정도'라고 했고, '화엄경'에서는 '보현행원'이라고 했습니다. 나아가 같은 내용을 매우 단순화하고 고도화한 것이 선불교의 '대무심행'입니다.
마찬가지로 "인드라망 존재인 부처님이시여, 이 세상에 영원토록 머물러 주십시오."라고 청하는 청불주세원도 내 인생을 부처로 사는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망설일 것 없네 당장 부처로 살게나_ 도법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