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비난하지 말 것_ 김수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방청객을 인터뷰하는데
청소년인 아들이 엄마에게
"엄마, 내가 나중에 벤츠 사줄게' 라는 말을 했다.
그 말에 엄마는 아들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물론 기특한 마음이다.
그런데 나는 좀 이상한 사람인지 어딘가 씁쓸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 아이는 엄마에게
벤츠를 사주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 아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정말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그렇다는 거다.
탯줄을 끊는 순간 돈줄이 연결된다는 말처럼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는 자식에게 많은 양육비를 쓴다.
치열한 경쟁을 뚫기 위해 높은 교육비도 부담한다.
대학에 가면 수천만 원의 등록금을 내야 하고,
자취라도 했다간 집세와 생활비로 매달 몇 십만 원씩 부담해야 한다.
그러니까 자식들은 사회에 발을 내딛기 전까지
부모에게 엄청난 빚을 지는 것이다.
그래서 커서 벤츠를 사주겠다는 이야기를 한다.
부모님의 등골 브레이커가 됐으니
벤츠 정도는 사줘야 이 빚을 갚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문제는 빚을 갚는 게 쉽지 않은 데 있다.
취업이 어렵다. 사회 진출이 자꾸 유예된다.
5%만이 대기업, 공사 등 안정적인 직장을 잡고(그래도 벤츠는 못 사드린다),
대다수의 경우 취업을 해도 월급은 빠듯하다.
그 월급을 가지고 결혼이라도 해서 신혼집을 장만할라치면,
은행에 빚을 지거나, 부모에게 또 다시 손을 벌려야 한다.
그 후 자식을 낳으면 나의 부모가 그랬듯
높은 교육비와 양육비를 지불해야 하니
이 사이클로는 부모님께 벤츠를 사줄 날은 오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존재한다는 이유로, 평범한 삶을 산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경제적, 정서적 빚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가.
진짜 문제는 높은 양육비와 교육비, 등록금, 주거비
그리고 이를 감당할 질 좋은 일자리의 부족이지
우리들의 잘못이 아니다.
사회에 발을 내딛기도 전에 빚을 잔뜩 안기는 사회,
그리고 그 빚을 갚을 방법은 내놓지 않는 사회에서
개인은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며 죄책감과 부채감에 시달린다.
만약 당신도 죄책감과 부채감에 시달려야 했다면
적어도 왜 빚쟁이가 됐는지는 알아야 한다.
그 사실이 빚을 탕감해주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스스로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우리를 빚쟁이로 만드는 사회가 병든 사회일 뿐.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_ 김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