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심리

휴대폰 off_ 전여옥

정정진 2020. 8. 8. 20:03

오랜만에 만난 한 외국친구가 있다. 거의 20년 만에 만났다. 그녀는 늘 날이 서 있고 뾰죽뾰죽했다. 냉철한 두뇌와 그에 따르는 행동도 한 치 어긋남이 없었다. 그녀를 보며 독일병정이라는 것이 바로 저런 거구나 싶었다. 늘 쌔한 분위기, 하지만 분명하고 정확하고 매우 지성적인 그녀만의 치명적인 매력이 있었다.

 

창백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하얀 얼굴, 회갈색의 긴 머리, 사람의 깊은 속까지 그대로 꿰뚫어보는 듯한 잿빛 눈동자, 한마디를 해도 어긋남이 없는 논리정연함. 특유의 냉철함으로 회사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그 독일병정녀가 한국에 왔다.

 

'사람은 30이 넘으면 변하기 어렵다.'

 

사회생활하면서 내가 깨달은 점이었다. 변화해봤자 그 기본, 바닥은 그대로인 경우를 너무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독일병정녀만큼은 온 인생을 기존의 기질 그대로 관통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그녀에 대한 마지막 소식은 아시아쪽 요직 지사장을 거쳤다는 소식까지였다. 약속장소인 일식집의 문을 여는 순간, 앉아 있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아니! 세상에..."

 

분명 독일병정녀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분명 그 독일병정녀가 아니었다. 이미 온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가 시작됐다. 나는 놀라움을 추스리며 세삼하게 그녀를 살펴보았다.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독일병정녀는 옛날 그 모습 그대로였다. 날씬하다 못해 마른 몸매, 머리 스타일도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 그대로였다.

 

그런데 바뀐 것은 바로 그녀의 눈빛이었다. 사람의 췌장까지도 투사할 것 같았던 그 날카로운 눈빛은 어디로 갔을까? 그녀의 눈에는 따사로움과 사람에 대한 배려와 선의, 그리고 애정이 가득 차 있었다.

 

아, 저런 눈빛을 어디서 누구에게서 봤을까? 나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전에 본 듯한 그 눈빛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떠올리려고 애썼다.

 

드디어 찾아냈다! 마더 테레사였다. 바로 그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세계의 유수한 제약회사에서 승진을 거듭했다. 신기록을 세울 정도로 실적도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 합병이 되면서 그녀가 청춘을 바쳐 쌓아놓은 업적도 합병이 되고 말았다. 무심했고 허무했다.

 

"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은 모래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일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는 목적 없이 정처 없이 늘 좋아했던 아시아 여행을 떠났다. 베트남과 인도네시아를 거쳐 중국에 이르러 드디어 그녀는 찾아냈다. 허무하지 않은 꽉 찬 것, '기공'이었다. 회사에서 사표를 내고 본격적으로 기공 공부를 했다. 그렇게 거의 10년을 보냈다. 지금은 베를린에 기공 스튜디오를 열었다고 했다.

 

"아, 그랬구나."

 

그녀의 쨍하고 쇳소리 같은 울림이 있던 목소리는 은근한 알토처럼 귀를 즐겁게 했다. 그리고 사람을 쳐다보는 그 눈빛은 매혹적이고 따스했다. 나 역시 최선을 다해 산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그녀를 보니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돼요?"

 

내가 허심탄회하게 물었다. 그녀는 우아하고 따뜻한 미소를 보내며 답했다.

 

"편한 시간에 명상을 하세요. 그냥 앉아서 눈을 감고 자신이 좋아는 곳을 상상하면 돼요. 간단해요."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명상을 해본 적이 없는데 더 간단한 것은 없어요?"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큰 소리로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공중으로 울려 퍼지자 우리 모두의 마음은 더 깨끗해졌다. 그리고 편안해졌다. 그녀의 웃음소리 하나만으로.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더 간단한 방법 있어요."


우리 모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루에 휴대폰을 두 시간 정도 꺼놓는 거요. 그게 바로 현대인의 명상이에요."

 

우리는 무릎을 탁 치며 끄덕였다. 현대인을 가리켜 휴대폰을 든 좀비라고 했다. 생각이 없는 이 좀비들은 휴대폰이 시키는 대로 생각한다. 휴대폰이 느끼는 대로 느낀다. 하루 종일 우리와 붙어 있는 휴대폰은 현대의 피부나 마찬가지다.

 

그녀의 눈빛이 근사해서, 그녀의 삶이 멋져서 나도 '좀비 탈출'을 시작했다. 우선 잠자리에 들기 두 시간 전에 휴대폰을 off 상태로 만든다. 그리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눈을 감는다. 이 경우 대개는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미소를 짓게 된다. 독일병정녀는 없다. 마더 테레사가 있다. 나 역시 최근 들어 달라졌다는 말을 듣고 있다.

 

"얼굴이 참 편안해졌어요."

 

모두 그녀 덕분이다. 나의 명상, 휴대폰 off 덕분이다.

 

산다는 것은 1%의 기적_ 전여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