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_ 성수선
TV를 틀면 예능이든 드라마든 아이돌 그룹 멤버들이 안 나오는 데가 없다. 제2의 BTS를 꿈꾸는 보이그룹과 걸그룹이 쏟아져 나오는 요즘, 이들을 경제학적 관점에서 풀어낸 '걸그룹 경제학'은 매우 흥미로운 책이다. 빅데이터를 활용해서 걸그룹들의 현황을 분석하고, 파레토 법칙, 링겔만 효과, 비교우위의 원칙 등 경제학 이론들을 적용하여 쉽게 설명해놓았다. 단순한 추정이나 섣부른 억측이 아닌 빅데이터를 분석한 만큼 통계와 그래프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 숫자들을 보는 게 무척 재미있었다.
나는 '걸그룹 경제학'을 읽으며 생각보다 내가 훨씬 '걸알못'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 책에 의하면 원더걸스와 소녀시대가 데뷔한 2007년부터 트와이스가 데뷔한 2016년까지 10년간 데뷔한 걸그룹의 수가 212개나 된다고 한다.(이중 내가 아는 그룹은 20개뿐이었다.) 한 그룹당 평균 멤버 수를 다섯 명이라고 할 때, 지난 10년간 걸그룹으로 데뷔한 소녀들은 1천 명이 훌쩍 넘는다. 2014년 한 해에만 37개의 걸그룹이 데뷔했는데 이 중 알려진 걸그룹은 마마무, 레드벨벳, 러블리즈 3개 그룹 정도이며, 총 212개의 그룹 중 대중적 인지도가 있는 그룹은 30개에 불과하다고. 어느 산업이나 경쟁이 심하지만, 이런 정글 속에서 어렸을 때부터 연습생 생활을 하며 살찔까 봐 떡볶이 한 번 실컷 못 먹었을 소녀들을 생각하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걸그룹 소녀들에 대한 연민은 '매몰비용'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극에 달했다. 데뷔 후 3년 안에 뜨지 못하면 '마이너'로 인식되어 이미지 전환이 어렵고, 수입이 없어도 비용은 계속 들기 때문에 데뷔 3년이 지난 비인기 그룹은 해체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걸그룹은 온라인 게임 캐릭터와는 달리 고가의 비행기나 요트처럼 유지만 하는 데도 돈이 많이 들어간다. 4인조 걸그룹이 소속된 D기획사의 이사에 따르면 한창 활동할 때는 매달 5,000만 원, 활동 없이 쉬고 있을 때도 3,000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든다고 한다.
소속사 입장에서는 자선활동을 하지 않는 이상 뜨지도 않고 수입도 없는 걸그룹을 무한정 유지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2016년 현재 기준으로 볼 때 2013년 이전에 데뷔한 그룹에 대해서는 해체를 고려하는 것이 소속사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걸그룹 경제학' 중 (데뷔 8년차 레인보우의 생존과 매몰비용) / 유성운, 김주영
'매몰비용'은 말 그대로 이미 지출되어 '회수할 수 없는 비용'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 주워 담을 수 없는데도 아까운 마음에 자꾸 집착하게 된다. 기업뿐만 아니라 개인도 매몰비용 때문에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특히 오래된 연인관의 관계를 정리하는 일이 그렇다. 그동안 만난 시간이 아까워서, 또다시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두렵고 막막해서, 아닌 걸 알면서도 끝내지 못하고 시간만 질질 끌다가 결국 아름답지 않은 결말을 맞이한다.
내 주변에는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관계가 틀어지는 커플도 여럿 있었다. 이때야말로 결단이 필요할 때이지만 매몰비용을 포기하기란 너무 어려웠을 것이다. 이미 결혼 비용으로 쓴 돈이 너무 많아서, 말 많은 동창들에게 청첩장을 돌린 후라서, 가족들을 실망시킬 수가 없어서, 결혼이 깨진다는 게 자존심 상해서 등과 같은 본질적이지 않은 이유로 결혼을 감행했던 몇몇은 엄청난 고통과 시련의 시간을 견디다 끝내는 돌아왔다.
남자친구와 만남과 헤어짐을 7년째 반복하고 있는 친구가 있다. 친구는 만날 때마다 지친 표정으로 남자친구와의 갈등과 문제에 대해 말한다. 들을 때마다 똑같은 얘기다. 이젠 정말 끝이라는 말을 듣는 것도 지겹다.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도 비슷한 패턴이 반복된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사랑이 변할 뿐, 얼마 전에 이 친구가 우울하다며 전화를 했다.
"이번에는 정말 헤어져야겠어. 이젠 정말 끝이야."
친구에게 위로의 말이나 충고를 하는 대신 저녁이나 먹자고 했다. 너무 우울해서 실컷 울고 싶을 때 가끔 가는 매운 떡볶이집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세상에서 가장 매운 떡볶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신떡'은 떡볶이가 빨간색이 아니라 검붉은 색이다. 비주얼만 봐도 두려울 만큼 매운맛이 느껴진다. 울고 싶을 때 내가 주문하는 메뉴는 이름도 과격한 '눈물 라면'이다. 먹으면 정신이 혼미해지고 이름처럼 눈물이 줄줄 흐른다. 청양고추나 매운 고춧가루로 내는 매운맛과는 결이 다르다. 뭘 넣은 건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매울 수 없을 것 같은, 극강의 매운맛을 자랑한다.
기분 전환 겸 신상 원피스에 신상 립스틱으로 한껏 멋을 부리고 나온 친구가 투덜거렸다.
"밥 산다고 나오라더니 겨우 라면이야?"
"일단 한번 먹어 봐. 진짜 아무 생각이 없어져."
라면이 나올 때까지 우리는 지인들의 근황 같은 가벼운 얘기를 주고받았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냄새만으로 대화를 일시에 차단해버리는 눈물 라면이 나왔다. 매운 냄새에 벌써 주눅이 든 친구는 한입 먹기도 전에 기침을 했다. 난 비장한 표정으로 젓가락을 들며 말했다.
"먹자."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혀가 얼얼할 정도의 매운맛이 훅 치고 들어왔다. 정신이 아득했다. 친구는 괴로운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매운맛은 미각이 아니라 통각이다. 매운 음식을 먹는 건 스스로를 괴롭히는 매우 피학적인 행위다. 하지만 고통과 동시에 쾌감이 느껴진다. 친구가 먼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사람 많은 장소에서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처럼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마스카라가 번지면서 시커먼 눈물이 뚝뚝 흘렀다. 라면을 반 정도 먹었을 때 나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친구를 따라 우는 것처럼, 우리는 좁은 테이블에 마주앉아 경쟁하듯이 울다가 눈물로 얼룩진 서로의 얼굴을 보고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화장 고치고 커피 마시러 가자."
근처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입 안의 매운맛이 가시지 않아 우리는 계속 멍하니 앉아 있었다. 눈물 라면을 먹으면 한동안 무념무상의 상태가 된다. 친구는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다 침묵을 깨며 말했다.
"벌써 7년이야, 7년. 아닌 거 알면서도 그렇게 보낸 시간이 너무 아까워. 그래서 헤어질 자신이 없어."
"지난 7년도 아깝지만, 그렇게 질질 끌면 힘들어하는 시간도 더 길어지잖아. 7년이 8년 되고, 8년이 9년 될 수도 있는 거잖아."
활동 없이 쉬고 있을 때도 한 달에 3,000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든다는 걸그룹처럼, 아닌 걸 알면서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시간을 끌 때, 매몰비용은 점점 커진다. 피할 수 있는 불행을 견디는 것도, 귀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다 비용이다.
친구는 손가락으로 커피잔을 빙빙 돌리며 말했다.
"이제 더는...... 아니겠지?"
난 친구의 질문에 답을 하는 대신 언젠가 교보문고 현판에서 본 도종환 시인의 <단풍 드는 날> 첫 문장을 들려줬다.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우리, 먹으면서 얘기해요_ 성수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