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정책
자본주의를 공부할 때_ 박정자 교수
정정진
2020. 5. 15. 18:12
한국은 사회주의 국가다
지금 한국은 사회주의 국가다. 집권 세력이 경제를 시장에 맡기는 대신 모든 것을 시시콜콜 계획하고 지시하는 계획경제 사회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자마자 인천공항에 가 비정규직을 없애라고 직접 지시를 내리더니, 이어서 소득 주도 성장을 선언하며 주 52시간의 근로시간, 최저임금 16퍼센트 인상 등을 자의적으로 결정했다. 에너지 정책을 원전에서 태양광으로 바꾸고, 월성원전 1호기를 조기 폐쇄했으며, 신규 원전도 백지화하여, 수천억 원의 손실비용은 물론 연간 9만 2천 명의 고용 유발 효과까지 날려 버렸다. 환경이라는 가치를 내세우며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지만, 태양열 집열판 설치로 숲을 베어 버려 결과적으로 환경 파괴가 일어났다. 대학에 원자력 전공 학생이 하나도 없게 되어 학문 분야의 왜곡도 심각하다. 더군다나 단순히 환경 문제라는 고귀한 이념보다는 자기들 진영의 사람들 이익 챙기기였다는 혐의가 짙다.
지금 한국은 사회주의 국가다. 개인은 말살되고 집단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해외에 나가 "지금 한국 정부는 촛불혁명에서 태어난 촛불정신의 국가"라고 스스로 말했듯이, 현재의 정부는 촛불집회라는 거대한 집단주의에서 태어난 정부다. 현 집권 세력은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미화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라고 해도, 민주주의가 무조건 절대적으로 좋은 건 아니다. 너무 철저하게 민주적인 정부는 필연적으로 전체주의가 된다. 역사 속에서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많이 보고 성찰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절대적 민주정이 공화정의 건전한 정체가 아니라 부패와 타락이라고 결론 내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들에게 전제적인 지배를 행사한다는 점에서 민주정과 전제정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고 했다. 민주정에서 민중의 명령은 폭군의 칙령에 해당한다. 마치 폭군의 총애를 받는 총신이 온갖 권력을 휘두르듯 민중은 집권 세력의 권력을 행사한다.
거리의 군중이 지배하는 민주정에서는 격렬한 의견 대립이 있을 때마다 시민의 다수파가 소수파에 대해 잔인한 압제를 행사한다. 이때 소수파에 대한 탄압은 1인 지배에서 행해지는 어떤 탄압보다 더 가혹하다. 민중이 자행하는 박해에서 고통을 당하는 개개인들은 다른 어떤 박해에서 보다 훨씬 더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현재 한국이 그러하다. 집권 세력과 조금만 다르게 생각해도 대학 교수는 강의에서 잘리고 공무원은 직장에서 해임된다. 연구실에 폭력 집단이 난입하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도 지배 이념을 조금 거스르는 듯한 기미가 보이면 악성 댓글이라는 무시무시한 여론 재판을 당해야 한다.
완전한 민주정은 세상에서 가장 파렴치한 것이다. 가장 파렴치하므로 동시에 가장 두려움이 없다. 지배 이념 속에 숨기만 하면 그 누구도 자신이 개인적으로 처벌 대상이 될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으므로 민주정 속의 민중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민중이라는 전체의 뒤에 숨어 온갖 불합리한 일들을 자행한다.
그러나 민중이 그런 자의적 권력을 행사할 권리가 있는가? 당연히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무제한의 자유를 과시하면서 부자연스럽고 도착적인 지배를 행사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진정 지배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자신들에게 모든 힘이 있다는 것은 착각일 뿐, 실제로는 정치 모리배들의 야망에 봉사하는 하찮은 꼭두각시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교육 수준과 지적 능력이 높아질수록 개인들은 다양한 견해와 취향을 보인다. 특정한 가치 체계에 획일적으로 동의하지도 않는다. 반면에 도덕적, 지적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더 높은 통일성과 더 높은 획일성을 보인다.
권력을 잡거나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지지 집단은 결코 취향이 고도로 분화되고 발달된 사람들이 아니다. 계획가들이 원하는 집단은 전혀 독창적이지 않고 독립적이지 않으며, 오로지 다수라는 숫자의 힘만을 가진 그런 집단이다. 이 집단은 프로파간다에 취약하고, 소문에 쉽게 속아 넘어가며, 감성적 선동의 먹이가 되기 쉽다. 이 거대한 대중이야말로 전체주의 정당의 부피를 한껏 부풀려 주는 인적 자원이다.
지금 한국은 사회주의 국가다. 모두가 돈을 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돈을 천시하고, 이윤을 죄악시한다. 그러나 과연 물질적 경제는 천한 것이고, 정신의 영역은 고귀한 것일까?
인간사에서 순전히 배타적으로 경제적이기만 한 목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돈에 대한 욕구란 언제나 다른 일반적 기회에 대한 욕구다. 즉, 구체화되지 않은 목적들을 성취할 수 있는 힘에 대한 욕구다. 우리가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은, 돈이 노력의 열매를 향유하는 데 가장 큰 선택의 폭을 우리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돈은 사람이 발명한 것 중 가장 큰 자유의 수단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입만 열면 자본주의를 공격하고, 가진 자를 증오하고, 자신들이 세상의 정의를 독점한 듯이 말한다. 모든 백성은 평등해야 하며, 돈은 천하다고 한다. 자신들은 오로지 가난한 자들만을 위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민낯을 들여다보면 온갖 불법적 수단과 비리를 통해 재산을 증식하고, 반대편을 가혹하게 매장하고, 능력과 전문성과는 상관없이 자기들끼리 공적 일자리를 나눠 먹는다. 부자를, 혹은 재벌을 욕하고 돈을 천시하는 척하지만 자신들은 영악하고 이악스럽게 돈을 챙긴다. 딸의 장학금 챙기기, 자신의 월급 챙기기에서 보여 준 조국의 행태나, 김제동, 김어준 등의 천문학적 강연료, 출연료가 그것을 잘 보여 준다. 자신과 자신의 자식들은 입신양명하여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위치에 있어야 하고, 돈도 많이 늘려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현재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이다.
지금 한국은 사회주의 국가다. 갓난아기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정부가 국민들에게 현금을 마구 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가 낸 세금이 마치 자기 돈인 양 국민들에게 공짜 돈을 나눠주고 있다. 2018년에 이재명 경기지사는 도내 만 24세 청년 16만 6천 명에게 연간 100만 원씩을 지급했고, 최문순 강원지사는 매달 출산 가정에 70만 원을, 청년 수당으로 60만 원을 지원했다.
이런 체제에 길들여지면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할 능력을 아예 상실한다. 젊은이들의 독립 정신이나 강인한 성격을 키워 주기도 어렵다. 미래의 스티브 잡스나 마크 저커버그가 될 싱싱한 젊음들이 1년에 고작 100만 원을 공짜로 받음으로써 무기력한 노예가 되어 가는 사회는 참으로 가공할 디스토피아다. "사회주의자는 경제를 계획하는 계획가들"이라고 하이에크는 말했지만, 우리의 계획가들은 아예 경제를 계획하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그냥 부자들에게 걷은 돈을 무차별적으로 나눠주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사회주의의 실패
한국은 자유민주,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나라 중에서 사회주의적 경향이 가장 심한 나라 중의 하나이다. 한 달 만에 낙마했지만, 법무장관이 자신의 이념을 사회주의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북한의 전체주의 체제를 버젓이 옹호하는 단체들이 거리에서 다반사로 시위를 하거나 미국 대사관을 습격하기도 하는 나라다. 서울 교보문고 광화문점의 '사회 일반'서적 매대에는 '20 vs 80의 사회 : 상위 20퍼센트는 어떻게 불평등을 유지하는가', '불평등의 시대', '공정하지 않다',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 왔는가',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 같은 책들이 깔려 있다. 모두 불평등을 다룬 책들이다. 불평등을 유난히 강조하는 것은 사회주의를 주장하기 위한 준비 단계이다.
그러나 벤 샤피로가 지적했듯이, 20세기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가장 큰 교훈 중의 하나는, 사회주의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소련에서 실패했다. 중국에서 실패했다. 탄자니아, 북한, 쿠바에서 실패했다.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등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사회'주의 때문이 아니라 아직 망가지지 않은 옛 자본주의의 잔여물 덕분이다. 자본주의 경제 없이는 국가가 구렁텅이에 빠지고 만다는 것을 지난 20세기가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
사회주의 성향의 우리 정부가 지난 2년간 막대한 재정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저소득 계층의 소득은 오히려 줄고, 소득 양극화는 더욱 심해졌다. 1분위(최하위 20% 구간)의 가계소득은 2017년 상반기에 283만 3천 원에서 2019년 상반기에 257만 9천 원으로 오히려 25만 4천 원 줄어들었다. 근로소득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근로소득은 같은 기간 동안 116만 1천 원에서 84만 3천 원으로 31만 8천 원이나 줄어들었다. 반면 최상위 20퍼센트의 가계소득은 2017년 상반기 1,757만 5천 원에서 2019년 상반기 1,935만 1천 원으로 177만 6천 원이나 늘어났다. 그 전 2015~17년 사이 최상위 가계소득이 59만 3천 원 늘었던 것의 세 배 가까운 증가폭이다. 결국 상위 계층으로 갈수록 근로소득 증가폭이 커지면서 소득 양극화를 확대시켰다. 저소득층의 소득을 높이겠다는 문 정부의 정책과는 전혀 달리 부익부빈익빈의 소득 양극화만 더 심해진 것이다.
좌파들의 주장과는 달리, 소득 양극화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모든 사회 구성원이 여유로운 생활을 하면서 다만 아래 계층이 최상류층의 사치는 즐기지 못하는 정도의 양극화라면 그것은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러나 지난 2년간 한국 저소득층의 생활은 한없이 피폐해지고, 거리의 상점들은 하나씩 문을 닫고 있다. 전반적으로 사회에 활기가 없어졌다. 사회의 활기란 경제 발전에서 나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 2년간 재정은 한마디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결국 사회주의는 경제를 발전시킬 수 없다는 또 하나의 실례를 세계사에 추가하는 셈이다.
답은 분명하다. 저소득층의 소득을 늘리려면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여만 한다. 사적 이기심을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열심히 일하여 자기 가족과 사회의 부를 일구는 자본주의 정신이야말로 가장 정의롭고 깨끗한 이념이다.
독자와 함께 공부한다는 자세로 전문가들의 책을 뒤적이고, 신문 기사를 검색하였다. 자본주의 경제의 고전인 애덤 스미스, 보수주의의 고전 에드먼드 버크, 자유주의를 역설한 하이에크 등의 저서도 함께 읽었다. 이들 책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또는 자본주의 역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부르주아 계급의 탄생 과정도 추적해 보았다.
베네수엘라나 북한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이야말로 자본주의를 공부할 때다.
2019년 12월
우리가 빵을 먹을 수 있는 건 빵집 주인의 이기심 덕분이다_ 박정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