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진
2020. 4. 23. 11:29
19세기의 위정척사파가 개국과 근대화를 반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주자성리학과 근대국가가 양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자성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서구식 근대국가 건설은 전형적인 법가식 부국강병의 길이었고 왕도 정치가 가장 경계해야 할 패도 정치로 전락하는 첩경이었다. 왕도 정치가 패도 정치로 전락하는 것은 문명이 야만으로 전락하는 것을 뜻했다. 위정척사파가 꿈꾼 '왕도정치'는 왕을 위시한 국가 엘리트가 사치를 멀리하고 솔선수범하여 근검절약하는 검소한 삶을 사는 '수기치인'의 정치였다. 치자들은 백성들이 평화롭게 농사를 지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전쟁이나 거대한 토목 사업은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피해야 했다. 그 대신 예의범절과 미풍양속을 널리 보급하면서 백성들이 향촌에서 가족, 친지, 이웃사촌들과 상부상조하면서 살아가는 대동 사회를 건설해야 했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부족한 가운데서도 서로 나누는 자급자족의 농본 사회가 왕도 정치의 이상이었다.
반면, 근대국가의 목표는 '부국강병'이다. 농업 대신 산업을 일으켜 수출을 하여 국부를 쌓아야 한다. 자급자족하는 경제가 아니라 세계의 수많은 나라들과 교역 하면서 세계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경제를 건설해야 한다. 근검절약 대신 소비를 권장하고 상업을 촉진시켜 시장경제를 활성화하고 백성들에게 검박한 미풍양속을 장려하기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제공해야 한다. 나라를 지키고 국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거대한 방위산업을 일으켜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고 때로는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 왕도 정치의 관점에서 본다면 '부강한 나라'는 반문명적인 사회다. 상업을 권장하는 것은 허영과 사치, 이기적인 행동을 조장하는 행위다. 조선이 '사농공상'의 신분 질서를 유지하면서 상인과 상업을 천시한 이유다.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백성들을 노역에 동원하고 노동력을 '착취'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왕도 정치의 입장에서 볼 때 '경제 발전'은 그 자체가 패도 정치였다. 거대한 군대를 유지하면서 군이 정치에 개입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패도 정치의 극치였다.
왕도 정치의 이상은 조선 특유의 약한 중앙 집권 체제를 낳았다. 왕은 이론적으로는 '절대군주'였으나 사대부들의 끊임없는 견제를 받으면서 '왕도 정치'를 구현해야 했다. 사대부는 과거에 급제하여 관료로서 중앙정부에 참여하는 것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았다. 그러나 동시에 사대부는 왕권이 강화됨으로써 패도 정치가 고개를 드는 것을 막는 것을 자신들의 임무로 여겼다. 결국 조선에서는 사대부도 왕실도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러한 체제는 안정적인 대외 환경과 자급자족이 가능한 농업경제하에서는 지속가능하였다. 조선조가 그토록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러나 왕도 정치는 국제 정세가 급변하고 외세가 침략하는 국가 재난 시에는 그 취약성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엘리트 계층은 아무런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물론 조선 왕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도 몰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조선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다. 조선이 양난을 견뎌낸 것은 임진왜란 때는 명이 원군을 보냈고 병자호란 때는 청이 조선의 멸망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도 정치를 지향하던 조선이 근세의 파고를 넘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부국강병책을 통해 근대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위정척사파가 꿈꾼 이상적인 왕도 정치는 물론 대원군이 시도한 제한적인 부국강병책으로는 국권을 유지할 수 없었다. 왕도 정치의 이상을 완전히 버리는 극단적인 근대화를 이룩하는 것만이 국가를 보존할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러나 끝까지 왕도 정치의 이상을 버리지 못한 조선 체제는 결국 19세기 서세동점의 시기에 힘없이 무너진다.
왕도 정치냐, 부국강병이냐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 받은 것은 조선만이 아니었다. 중국도,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청 말의 중국 엘리트들은 '동치중흥'을 통하여 '중체서용'이라는 절충주의를 택한다. '양무운동', '변법자강운동' 등을 통해 유교적 왕도 정치와 근대국가 건설을 동시에 추구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청은 멸망한다. 반면,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왕도 정치를 버리고 양이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이면서 부국강병의 길을 간다. 일본의 근세 사상가들과 정치지도자들은 주자성리학적 왕도 정치를 '봉건' 또는 '구습'이라고 비판하고, 서양을 따르는 것을 '문명개화'로 받아들이면서 인식의 대전환을 이룩한다.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에게는 동양이 야만이고 서양이 문명이었다. 일본에게 '문명'과 '근대화'는 더 이상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었다.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하는 이유다.
조선의 개화파도 외세가 나라의 존립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당연히 왕도 정치가 아닌 부국강병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처럼 과감한 개혁과 개방을 통해서 구체제와 구습을 일소하고 서구의 사상과 가치와 풍속과 체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이 만주족의 두발과 복식을 거부하면서 명의 것을 지켜냈다면 이제는 단발을 하고 서양식 복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위정척사파는 근대화란 곧 왕도 정치 이념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서구 열강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부국강병이 필요할지 몰라도 부국강병을 위해 왕도 정치를 버린다면 조선도 양이와 같은 오랑캐로 전락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조선의 왕도 정치는 바다간너의 왜가 나라를 유린하고 만주의 오랑캐가 중원을 차지했어도 지켜낸 문명이었다. 이제 와서 서양 오랑캐의 기술에 현혹되거나 굴복하여 문명을 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본이 말하는 '문명개화'는 동양의 오랑캐인 왜가 서양의 오랑캐를 흉내내는 것에 불과하고 그들이 추구하는 '부국강병'은 '패도 정치'일 뿐이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문명을 버리고 야만을 택할 수는 없었다.
~
그러나 민족주의자들에게 '전통문화'는 결코 민족보다 우위의 개념이 아니다. 문화란 어디까지나 민족의 총화와 일치단결을 돕는 도구일 뿐이다. 같은 민족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갖기 위해서는 같은 '역사'와 '전통', '가치관'을 공유해야 한다. 민족이 민족일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공유하는 전통뿐이다. 한 민족과 국가가 같은 전통을 물려받은 하나의 공동체라는 의식이 없다면 민족주의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 민족주의자들이 전통을 중시하는 이유는 전통이야말로 민족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가장 손쉬운 기제이기 때문이다. 반면, 위정척사파들이 충효 사상과 삼강오륜을 지키고자 했던 이유는 그것이 보편타당한 절대적인 가치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주자성리학과 중화가 중요했던 이유는 그것이 중국의 것이기도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보편타당한 진리였기 때문이다.
민족주의 지식인들에게 전통 사상은 더 이상 지적으로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서양의 과학기술과 사회과학, 인문학이 훨씬 더 매력적이고 보편타당한 지식 체계였다. 민족의 부강을 보장할 수 있는 것도 서구의 근대 문명이었다. 위정척사파들이 지키고자 했던 유교 문명은 '우리'를 '민족'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유용한 기제였지만 현재와 미래의 민족과 국가의 중흥을 위해서는 아무런 역할을 해 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의 전통을 칭송하기도 하지만 필요할 때는 가차없이 '구습'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민족주의자들은 문화상대주의자들이다.
물론 주자성리학의 세례를 받고 자란 조선 말의 민족주의 지식인들과 정치지도자들은 주자성리학과 중화 문명에 대한 강력한 향수를 갖고 있었다. 오랜 학습과 수련을 통해 물려받고 체현하고 있는 문명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민족주의자들이 '전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다. 충효 사상, 삼강오륜 등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가치관, 미풍양속, 언어 등은 민족 정체성의 핵심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정척사파나 민족주의자들이나 같은 유교 전통을 지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피상적인 이해다. 전통이 중요한 것은 민족과 국가를 강하게 해주는 기제이기 때문이지 그 자체로 중요하거나 절대적이어서가 아니다. 민족주의자가 전통을 수호하고자 하는 것은 민족주의를 더 잘 하기 위한 도구로서 유용했기 때문이다.
한국 민족주의는 조선 문명에 대한 거부에서 출발한다. 민족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궁극적인 가치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조선이 추구했던 '중화주의'를 버려야 했다. 그것이 비록 500여년 동안 조선 사람을 규정하는 지고의 가치였다 하더라도 '민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포기해야 했다. 아무리 '정통'이라 하여도 그것이 민족과 국가를 허약하게 만들고 결국 외세에 나라를 빼앗긴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반면 민족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어떤 이념, 체제, 사상도 받아들여 '우리의 것'으로 만들 준비가 되어있어야 했다. 궁극적인 목표는 민족의 보전이었다. 이를 위해서 정통과 전통을 버리고 이단과 외래 문명을 수용해야 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했다.
반면, 위정척사파가 바란 것은 왕도 정치도 살리고 나라도 살리는 길이었다. 왕도 정치도 나라가 있어야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정척사파들은 왕도 정치가 없는 국가를 상상할 수 없었다. 조선이 야만의 길을 갈 수는 없었다. 나라를 지킨다는 미명하에 오랑캐가 될 수는 없었다. 왕도 정치가 사라지고 패도 정치로 운영되는 나라, 문명이 사라지고 야만이 판치는 나라는 존재할 가치가 없었다. '문명이냐, 나라냐?'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위정척사파는 결국 문명을 택한다. 위정척사파는 근대화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근대화를 거부했다.
한국 사람 만들기 1_ 함재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