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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불신하는 사회_ 이주일

정정진 2019. 7. 19. 14:27


우리 사회는 비정상적인 사회다. 서로가 서로를 불신한다. 조금만 틈을 보이면 서로 깎아 내리기에 정신이 없다. 잘 난 사람을 도저히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누가 좋은 일을 해도 어떻게 하든 트집을 잡아 매도해버리는 사회,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못나야 대접을 해주는 사회가 우리 사회다.


1992년 8월 황영조가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을 했을 때의 일이다. 국회의원이 되고 5개월이 막 지났을 때다. 당시 국회는 공전 상태였고 나는 단 한번도 국회의사당에 서본 적이 없었다. "뭐 하러 국회의원이 됐나?"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러면서 5개월 동안 세비는 꼬박꼬박 챙긴 내 자신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 없었다.


나는 그 동안 받은 세비 2,000만 원을 모두 황영조 선수에게 줬다. 국회의원인 나보다 국가를 위해 훨씬 더 큰 일을 했다는 생각에서였다. 자랑스러운 강원도 고향 후배를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 나는 주위 사람들과 동료 의원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기 시작했다. "네가 뭔데 2,000만 원이나 주는 거냐?" 는 식이었다. "그러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는 소리도 들었다.


며칠 전 경기 고양시 국립암센터에 입원해 있을 때는 더 가슴 아픈 일도 있었다. 내 옆 병실에 30~40대로 보이는 남자 5명이 병문안을 왔는데 복도를 지나가다 우연히 나를 본 모양이다. 나는 당연히 이런 말을 기대했다. "선생님, 고생 많으십니다. 쾌유를 빕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나가며 불쑥 내뱉은 말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주일이, 이제 완전히 갔구만."


내 초라한 몰골이 그들에게는 그렇게 통쾌했을까. 잘 나가던 사람이 갑자기 자기보다 못나 보이니까 그렇게 웃을 수 있는 것일까.


주치의인 이진수 박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이 미국인 친구 의사들로부터 가장 자주 듣는 말이 "왜 너희 나라 사람들은 한국 병원 놔두고 미국 병원으로 오느냐"는 것이다. 치료방법과 시설은 똑같은데도 최소 10배이상 비싼 치료비를 무릅쓰고 미국에 가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게 이 박사의 설명이다. 내 생각에 이는 한국 의사와 한국 병원에 대한 '있는' 사람들의 불신이 높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신의 사회를 제대로 잡아줘야 할 곳이 정치권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해 안타깝다. 아니, 내가 경험한 바로는 정치권이 훨씬 더 심하다. 국회의원이 된 지 5개월 만에 정치에 발을 디딘 것을 후회했을 정도로 정치권내 불신의 벽은 너무나 높았다. 서로가 서로를 조금도 믿지 못하는 곳이 바로 정치권이었던 것이다.


인생은 코미디가 아닙니다_ 이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