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체가 상큼해지는 순간_ 하정우
강남에서 김포공항까지, 나의 걷기 다이어트
종일 책상 앞에서 일하는 직업을 가진 이가 "제 몸엔 머리와 손밖에 없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라고 말해서 흠칫 놀란 적이 있다. 아마 많은 사무직 종사자들이 공감하는 얘기일 것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다리 대신 바퀴에 의지해 잽싸게 이동하길 요구하고, 머리와 손은 더 빨리 움직여 생산성을 높이라고 다그친다. 이런 와중에 내 다리를 뻗어 천천히 한 걸음을 내딛는 행위는, 잊고 있던 내 몸의 감각을 생생하게 되살리는 일이다.
나는 걸을 때 발바닥에서 허벅지까지 전해지는 단단한 땅의 질감을 좋아한다. 내가 외부의 힘에 의해 떠밀려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뿌리내리듯 쿵쿵 딛고 걸어가는 게 좋다.
그런데 내 두 다리가 받칠 수 있는 것보다 체중이 불어나면, 걸을 때 무릎과 발목에 피로가 빨리 온다. 나도 영화 촬영 기간이 아닐 때는 몸무게가 약간씩 늘곤 하는데, 굳이 체중을 달아보지 않아도 걸으면 바로 안다. 다리가 묵직하고 숨이 더 빨리 가빠온다. 몸이 비만할 때는 많이 걸으면 발목, 무릎, 골반, 허리까지 차례로 아프다가 팔이 저리고 손발이 붓는 경우까지 있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이 단계에서 포기하고 걷기를 중단하는데, 사실 이럴수록 더 걸어주어야 한다. 꾸준히 걷다보면 이런 통증들이 조금씩 풀리고, 살도 빠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하체가 아주 '상큼'해지는 순간이 온다.
걸을 때 하중이 거의 없이 가뿐한 상태, 이것이 내가 유지해야 할 최적의 몸무게다.
걷기는 몸의 균형을 잡아준다. 하루 만 보씩 걸으며 식사량을 아주 조금만 조절해도 한 달만 지나면 살이 꽤 빠진다. 그뒤 식사 조절을 계속하면서 두 달째부터는 만 보에서 만 오천 보로 슬쩍 늘려서 걸어본다. 그렇게까지 힘들게 식이요법을 한 것도 아니고 하루종일 운동에만 매달린 것도 아닌데, 체중감량에 가속도가 붙어 다이어트의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촬영을 앞두고 '급다이어트'를 해야 하는 경우, 절대먹지 말아야 할 금지식만 몇 개 정해놓고 평소처럼 먹고 계속 걷는다. 햄버거, 탄산음료, 설탕과 소금이 과하게 들어간 음식 - 장담하는데 딱 이 메뉴만 식단에서 걷어내고 꾸준히 걷기만 해도 확실히 살이 빠진다.
영화 <터널>을 촬영할 때, 단기간에 살을 쫙 빼야 하는 순간이 왔다. 무너진 터널 안에 고립돼 있던 주인공 정수가 사투를 벌이며 버텼건만 구조에는 아무런 성과가 없고, 시간만 무심히 3주 뒤로 훌쩍 점프한다.
원래 그 3주 후의 장면은 촬영 중간에 2주 동안의 텀을 두고 철저하게 체중감량을 한 뒤 촬영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촬영 스케쥴상 내겐 부득이하게 딱 5일의 시간이 주어졌다. 5일 동안 빠르게 다이어트해서 제대로 먹지도, 빛을 보지도 못해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변신해야 했다. 그런데 서울에서, 게다가 1월 초에 무슨 수로 단 5일 만에 살을 쪽 뺀단 말인가.
갑갑했다. 다른 길은 없었다. 일단, 따뜻한 남쪽 섬 제주도로 건너가서 무작정 걸어보기로 했다.
다이어트 돌입 첫날, 나는 아침 7시에 집에서 출발해 김포공항을 향해 걸었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 몇 시간을 걸어가다니 참 희한하다 싶겠지만, 그때 나는 이동하기 위한 일 분 일 초까지 오롯이 살을 빼는 데 써야 했다. 부지런히 걸어 김포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3시. 냉큼 3시 반 비행기를 잡아타고 제주도로 날아갔다. 숙소에 도착한 후 짐을 풀자마자 나와서 인근의 올레길을 네 시간 동안 걸었다. 내가 가진 시간을 꽉 채워 서울과 제주를 걸으니, 뒤숭숭했던 마음이 가라앉으며 어느 정도 해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이튿날 새벽 4시에 일어났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한라산 등정에 나섰다.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숙소에서 삼십 분 정도 몸을 녹였다. 그리고 다시 나가서 내리 여섯 시간을 걸었다. 돌아와 기절하듯 잠들었다.
셋째 날, 아침 6시에 일어나 조식을 먹었다. 7시 출발. 밤 11시까지 쭉 걷다가 들어왔다.
제주도에서의 4박5일 일정은 이런 식으로 점점 더 단출해지고 간명해졌다. 단순해지는 일정만큼 몸도 가벼워졌다. 서울에 돌아왔을 때는 체중이 4킬로그램 줄어 있었다. 수치보다 더 효과적이었던 건, 산바람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사연 많은 방랑객처럼 종일 걸어다닌 덕분에 꽤 수척한 몰골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극중 정수의 3주 후 모습으로 말이 되겠다 싶었다.
내가 아는 영화제작자 중에 몸무게가 100킬로그램이 훌쩍 넘는 형이 있었다. 일이 바쁘다보니 자가용 몰고 다니는 게 일상이요, 그마저 여의치 않을 때는 택시 안에서 전화하고 밀린 서류를 정리하기 일쑤였다. 다리보다는 바퀴로 굴러가는 게 당연한 삶이었다. 그러나 일만큼 형의 건강도 소중하기에 나는 함께 걷자고 집요하게 졸랐다.
드디어 형이 시간을 내서 나와 나란히 산책길에 나선 기적 같았던 어느 날, 그러나 형은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걷다 멈추고 택시를 불러서 집에 가버렸다. 형이 의지가 없는 게 아니라 과체중인 사람에겐 걷기도 그만큼 힘에 부치는 활동인 것이다.
그날 형은 포기했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내가 느낀 걷기의 장점에 대해 전했다. 그러자 형도 서시히 내 말에 귀기울이기 시작하더니, 하루하루 조금씩, 아주 조금씩 더 걷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 결과, 지금 그는 걷기 다이어트로 인해 인생이 바뀌었다고까지 말한다. 일단 살이 쑥 빠진 것은 당연하고, 내가 봐도 지금 형의 얼굴은 해사하게 빛난다. 오랜 세월 100킬로그램이 넘는 거구로 살다가 살이 20킬로 이상 빠져서 옷도 슬림하게 입고, 사람들을 만날 때 자신감까지 붙으니 영화 일까지 술술 풀리고 있다.
형은 걷기 전보다 훨씬 더 바빠졌지만, 지금도 3년째 꾸준히 걷고 있다.
사실 과체중인 사람이나 초보자, 바쁜 사무직 직장인들에게는 만 보도 많을 수 있다. 일일 만 보는 미국 심장학회에서 심장질환 예방을 위해 권장하는 수치일 뿐, 내게 꼭 맞는 걸음수는 아닐 수도 있다. 처음엔 오천 보부터 시작하자. 무리한 목표를 세우고 금방 포기하기보다는 내가 목표한 걸음수만큼 가뿐하게 도달하며 걷기의 즐거움을 느끼는 게 우선이다.
아무리 동네에 걸을 데가 없다 해도 골목길과 인도 정도는 있을 것이다. 지금 당신 주변에 있는 가장 가까운 길을 슬슬 걷는 것, 무리한 단식과 절식 없이 내 몸에 아주 작은 변화를 주는 것, 이것이 내가 권하는 걷기 다이어트의 시작이다.
걷는 사람, 하정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