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든 떠나고 싶은 마음이 당연하다_ 임성미
한 남자가 오십이 된 후 꿈에 그리던 산티아고에 갔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원했던 길이던가! 한 달 간의 귀한 휴가를 얻어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그런데 그의 묵상을 방해한 건 등에 진 무거운 배낭이었습니다. 무거운 배낭 때문에 걷기도 힘들고 몸 여기저기 통증이 몰려와서 순례길이 고행길이 될 판이었습니다. 결국 짐을 버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배낭을 열어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하나씩 버렸습니다. 처음에는 배낭에서 버려야 할 물건을 고를 때마다 망설이고 또 망설였습니다. 아깝지 않은 물건이 없었습니다. 고르고 골라서 산 물건들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계속 길을 걸으려면 버려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깝게 여겨서 버릴까 망설였던 물건들이 없어도 순례길에 전혀 지장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순례길에는 약간의 먹을 것과 최소한의 옷만 있으면 되었으니까요.
그 남자는 깨달았습니다. 순례길이 바로 우리 인생길과 같다는 것을요. 꼭 필요한 것들만 갖고 살아도 되고, 필요한 것들은 살아가면서 그때그때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실상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은 그리 많지 않음을 말입니다. 버릴수록 짐은 가벼워졌고 더 잘 걸을 수 있었습니다. 잘 걸을수록 에너지는 내부로 향했고 순례길의 본래 목적인 '나'를 만나는 체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는 제가 아주 좋아하는 책입니다. 침대 머리맡에 두고 가끔씩 읽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곤 합니다. 저자를 만나본 적은 없지만 저자의 기운과 미소가 바로 곁에 있는 듯 느껴지는 책입니다. 아무래도 제가 이 책의 저자를 좋은 아버지, 좋은 어른의 이미지로 인식하기 때문이겠지요. 실제로 저자를 만난다면 같은 느낌이 들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영국인입니다. 저자는 고등학교 때부터 불교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대학 졸업 후 학교에서 선생님을 하다가 태국의 밀림으로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책 속의 108가지 이야기 중 기억에 남은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한 수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정체 모를 병에 걸려 몇 해 동안 병원에 누워 있었습니다. 수도원의 사람들은 그를 살리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차도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지혜로운 수도원장이 중병에 걸린 그를 찾아왔습니다. 수도원장이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염려하는 모든 사람들을 대표하여 당신에게 죽음을 허락하기 위해 왔소. 이제 당신은 회복하지 않아도 좋소." 그 말을 듣고 수도자는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동안 그 자신은 물론 동료 수도자들도 그를 돕느라 많은 고생을 했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도 병이 낫지 않자 그는 죄책감과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수도원장이 한 말을 듣고 그는 그 병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음을 느꼈습니다. 심지어 마음 편하게 죽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주위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날부터 그 수도자는 병에서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진짜로 버려야 할 것들
버려야 할 것들은 반드시 물건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 또 누군가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도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염원과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죄책감도 우리를 짓누르지요. 그런가 하면 온갖 건강 프로그램에서는 암에 잘 걸리는 유형이나 암을 예방하는 방법들이 나옵니다. 어떤 심리 전문가는 암에 걸린 사람은 평소 자기 관리를 소홀히 한 사람인 양 떠들어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발언들 때문에 우리는 암 환자가 되면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돌보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과 가족들에게 짐이 되었다는 부담감에 괴로움을 느끼지요. 그리고 주변에서 염려해주고 기도해준 것에 답하려고 건강해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다 아무리 노력해도 차도가 없으면 더 초조해지고 절망감을 느낍니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심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면서 버릴 것은 쓸데없는 물건들만이 아닙니다.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것, 주위의 평판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마음도 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엄마가 나를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내가 이러면 안 되지'라든가 '나 때문에 애쓰는 그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면 안 되지' 같은 생각들로부터 이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동시에 아픈 사람들을 대할 때에도 "내가 당신의 쾌유를 위해서 얼마나 애쓰는지 알지요? 그러니 빨리 나아야 해요"와 같은 말들은 삼가는 게 좋습니다. 자기 몸도 아픈데 타인의 감정까지 배려하다 보면 더 힘들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타인을 얼마나 염려하고 사랑하는지를 너무 열심히 전달하려는 열정 때문에 타인을 더 힘들게 하기도 한다는 걸 이제 알아야만 합니다.
내가 그은 선의 바깥까지 나아가려면
인생의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 구도의 길은 무엇일까요? 저는 반드시 스님이나 수도자가 되는 것이 구도의 길을 걷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구도나 출가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나가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만이 옳다고 굳게 믿으며 자신과 다르게 말하는 사람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다고 말하는 그 사람 쪽으로 가보는 것, 자기 확신에서 자기혁신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깨달음을 얻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구도의 길을 떠나려면 낯선 곳으로 가야 합니다. 여기서 낯선 곳이 반드시 낯선 장소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 여행을 간다고 해서 그리스 정신을 전부 배웠다고 말할 수 없고, 그리스 정신이 나를 바꾸지도 않듯이 말입니다. 낯선 곳이란 이제까지 만나지 않았던 사람이나 낯선 책, 낯선 사상을 의미합니다.
도를 좀 닦았다는 성인들, 공자는 물론 노자, 묵자, 한비자 같은 중국 도인들은 물론이고 예수님과 부처님도 모두 책을 많이 읽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로부터 전승된 지식들을 문자든 구술이든 그것들을 습득하지 않고는 그분들이 자신의 학문이나 사상을 세울 수 없었을 테니까요. 그러므로 중년이 되어 훌쩍 떠나고 싶은 사람은 책의 숲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면 어떨까요?
담요와 책만 있다면_ 임성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