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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눈 것만 남는다_ 변택주

정정진 2019. 5. 12. 11:57


법정 스님은 베푼다는 말을 쓰는 것을 경계하신다. "우리가 지니고 사는 이 모든 것은 우주에서 주어진 선물일 뿐 어느 특정인 것이 아닌데 누가 누구에게 베푼단 말인가." 하고 일갈하신다. 내게 주어진 우주선물을 그저 관리하고 나눌 뿐이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 그리고 자식도, 끌어안고 애지중지하던 재물도, 죽는 길에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 오직 자신을 따라나서는 것은 자신이 행한 행위, 업일 뿐이라고 강조하신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나눈 그 행위만이 떨어지지 않고 죽음 길까지 꼭 달라붙어 따라다닌다는 말씀이다.


네 사람 아내를 둔 돈 많은 상인이 있었다. 그 상인은 네 번째 아내를 가장 사랑했으며, 그이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맛있는 음식을 먹였다. 그 사람은 그이를 끔찍이 아꼈고, 가장 좋은 것만을 사주었다.


세 번째 아내도 끔찍이 사랑했다. 그이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겨 늘 친구들에게 뽐내고 다녔다. 그러나 그 상인은 늘 그이가 다른 남자와 달아날지 모른다고 불안해했다.


두 번째 아내 역시 극진히 아꼈다. 그이는 매우 사려 깊은 사람으로서 참을성이 있었으며, 사실 그이는 상인이 비밀을 털어놓는 사람이었다. 문제가 생길 때면 언제나 두 번째 아내와 상의를 했고, 그이는 늘 그를 도와서 어려운 시기를 잘 넘기도록 했다.


첫 번째 아내는 매우 성실한 동반자였으며, 가사를 돌보는 것은 물론 그가 부와 사업을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그는 첫 번째 아내를 사랑하지는 않았으며, 비록 그이가 그를 끔찍이 사랑했지만 그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느 날 상인은 병이 들었다. 오래지 않아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았다. 그는 자기 화려한 삶을 돌아보며 혼잣말을 했다. "내겐 아내가 네 사람이나 있지만, 내가 죽으면 나는 혼자가 되겠지. 아, 얼마나 외로울까?"


그래서 상인은 네 번째 아내에게 물었다. "난 당신을 가장 사랑했소. 당신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당신을 끔찍이 아꼈소. 난 이제 죽을텐데 당신이 나를 따라오지 않겠소?" 그러자 "절대 안 돼요!" 네 번째 아내는 뒤로 돌아보지 않고 걸어나갔다. 그 말이 비수가 되어 상인 가슴을 찔렀다.


서글퍼진 상인은 세 번째 아내에게 물었다. "내 평생 당신을 아주 사랑했소. 난 이제 곧 죽을 텐데 당신, 나와 함께 가지 않겠소?" 네 번째 아내와 마찬가지로 세 번째 아내가 외쳤다. "아니 따라갈 수 없어요! 여기서 사는 게 얼마나 좋은데요. 당신이 죽으면 난 재혼할 거예요!" 그 상인 가슴은 무너져 내렸고, 울적해졌다.


하는 수 없이 상인은 두 번째 아내에게 물었다. "나는 늘 당신에게 도움을 청했고, 당신은 늘 날 도와줬소. 당신 도움이 또 필요하구려. 내가 죽으면 당신, 나와 함께 가주지 않겠소?" 두 번째 아내가 대답했다. "미안해요. 이번에는 당신을 도와줄 수가 없네요. 기껏해야 당신을 묻어줄 수 있을 뿐이랍니다." 청천벽력 같은 말에 상인은 기가 막혔다.


그때 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따라가지요. 당신이 어디에 가든, 난 당신을 따라가겠어요." 그 상인이 쳐다보니 거기에는 자기 첫 번째 아내가 있었다. 그이는 너무 말라서 거의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 같았다. 그 상인은 비탄에 잠겨 말했다. "진작 당신을 좀 더 보살폈어야 했는데..."


우리는 누구나 아내 네 사람을 가졌다. 네 번째 아내는 몸이다. 그것이 멋지게 보이도록 아무리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부어도 내가 죽으면 내 곁을 떠난다. 세 번째 아내는 지위나 부다. 내가 죽으면 모두 다른 사람에게로 간다. 두 번째 아내는 가족과 친구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이 아무리 가까웠더라도, 그들이 내 곁에 가장 가까이 다가올 수 있는 곳은 무덤까지다. 첫 번째 아내는 내가 지은 업이다. 우리는 물질, 재산, 감각 쾌락을 추구하느라 종종 이 업을 잊어먹는다. 하지만 업은 우리가 어디를 가든 유일하게 우리를 따라온다.


법정 스님은 '맑고 향기롭게'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다짐했다.


"깨달음에 이르려면 두 가지 일을 스스로 실행해야 합니다. 하나는 자신을 속속들이 지켜보는 일입니다. 또 하나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조선일보 논설위원이었던 이규태 선생이 오래전 100세 노인들을 인터뷰 하러 다닐 때 일화다. 구례에 사는 한 100세 노인이 방 벽에 써놓은 '일구잔一口殘'이란 글이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일구잔은 '밥 한 입을 남긴다'는 말이다. 밥을 먹을 때 배가 8부만 차면 이 경구를 올려보고, 아무리 먹고 싶어도 밥 한 입 남기기를 평생 지켜온 것이 오래 산 비결이라고 했다. 그렇게 남긴 밥일랑 으레 들르는 탁발하는 스님에게 보시하고 그 스님은 여러 사람을 위해 행복을 빌어주니, 한 입 밥으로 온 세상이 다 평안해진다는 이야기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저 혼자 잘났다고 따로 노는 것은 공생공존을 해친다고 해, 남 나름, 나눔 지향 삶을 살아왔다. 조물주가 사람을 만들 때 열 칸으로 갈라 넣어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열 칸 마음 가운데 세 칸만 네가 갖고 나머지 일곱 칸은 남을 위해 비워두라고. 빗장도 걸지 않고 비워둔 마음에 편하게 드나드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싶어 하는 것이 한국인이다. 우리 겨레는 이렇게 정을 가르며 서로를 넘나들고 드나들었다.


사람이란 자신이 한 행동 총합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선택해 행한 모든 행위만이 온전히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다.


'나눈 것만 남는다.' 준엄한 말씀이다.


법정스님 숨결_ 변택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