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에게 바른 한자음을 가르치다_ 이영훈 교수
오늘날 대다수의 한국인이 세종을 성군으로 받드는 가장 큰 이유는 뭐라 해도 그의 훈민정음 창제에 있다고 하겠다. 그에 관한 오늘날 관련 학계의 통설적 이해는 다음과 같다. 1443년 세종은 어리석은 백성에게 쉽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문자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당신이 손수 세계적으로 뛰어난 표음문자인 훈민정음을, 즉 오늘날의 한글을 만들었다. 세종의 한글 창제는 그의 지극한 애민정치의 소산이었다. 또한 세종의 한글 창제는 중국과 구분되는 조선 독자의 정체성, 곧 민족주의의 발로였다. 조선왕조는 그때부터 세계사적으로 근세라 할 만한 문명의 고양기를 맞이하였다. 마침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 연례의 한글날을 맞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의 민족주의는 세종의 한글 창제부터라고 칭송하였다. 과연 그러한가.
2015년 정광 교수가 '한글의 발명'을 출간하였다. 몇몇 신문에서 그 내용을 소개했으며, 저자와의 인터뷰도 실었다. 나는 그것을 읽고 더없이 흥분하였다. 정광 교수는 세종의 한글 창제에 관한 위와 같은 통설적 이해를 하나하나 남김없이 부정하였다. 나는 당장 그 책을 사서 독파하였다. 그러고선 "옳은 이야기야, 역시 그러했군." 하면서 무릎을 쳤다.
여기까지 서술한 노비제, 기생제, 사대주의에 대한 세종의 정책은 내가 오랫동안 관련 사료나 연구 성과를 읽으면서 한뜸 한뜸 생각해온 것들이다. 때문에 그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내가 나의 명예를 걸고 책임질 수 있다. 그런데 세종의 한글 창제에 관한 학계의 통설적 이해는 세종에 대한 나의 평가와 아귀가 맞지 않는다. 나로서는 그 어긋남을 어찌할 수 없었다. 나의 전공과는 너무 동떨어진 언어학과 국어사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어긋남을 정광 교수의 '한글의 발명'이 말끔하게 해소해주었다. 어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먼 길을 걸어와 몸에 지닌 신표를 대조하니 딱 들어맞는 그런 기분이었다. 정광 교수가 세종의 노비제, 기생제, 사대주의 정책에 관해 나와 이해를 같이한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의문이 들었지만 물어볼 엄두도 못 내었다. 워낙 상이한 전공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두 사람의 신표가 딱 들어맞는다고 한 것은 어디까지나 나만의 흥취에서 하는 말이다. 이하 내가 이해한 수준에서 아주 간략하게 '한글의 발명'을 소개한다.
중국어는 주어, 동사, 목적어로 이어지는 토가 없는 고립어이다. 반면 주변 여러 민족의 언어는 주어, 목적어, 동사로 이어지는 토가 있는 교착어이다. 주변 민족은 중국 한자의 뜻, 음, 형태를 빌리거나 바꾸어 자신의 문자생활을 영위하였다. 한국도 신라와 고려에 걸쳐 향찰, 이두, 구결을 개발하였다. 그런 중에 주변 민족은 중국 문화로의 동화를 경계하여 독자의 표음문자를 제작하였다. 티베트의 서장문자, 요의 거란문자, 금의 여진문자, 몽골의 위그루문자와 파스파문자가 그것이다. 이것들은 기원전 고대 인도에서 발달한 음성학의 전통을 잇는다. 세종의 훈민정음도 이같이 전개된 중국 주변의 표음문자 계보에 속한다. 특히 173년 전에 개발된 파스파문자로부터 직접적 영향을 받았다. 초기의 조선왕조는 고려왕조의 전통을 이어 파스파문자를 사용했으며, 몽골어 역관들은 파스파문자의 시험을 치렀다.
세종의 독자의 문자를 개발하게 된 계기는 동시대 조선의 한자 발음과 중국의 그것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동시대 조선의 한자 발음은 이 땅에 한자와 그 발음이 유입된 이래 오랜 세월을 거쳐 10세기경에 정착한 것으로서 대략 수당시대의 중국어와 일치하였다. 그런데 원명시대에 걸쳐 중국어의 중심이 북경어로 바뀌었다. 그에 따라 양국 간 문자와 언어의 소통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에 세종은 동시대 북경어 중심의 한자 발음을 정확히 표기할 목적에서 발음기호를 창제하였다. 그것이 훈민정음이었다. 글자의 뜻 그대로 백성에게 가르칠 바른 음을 표기한 기호였다. 바른 음 그것은 동시대 북경어의 한자 발음을 말하였다. 통설대로 훈민정음은 하층 서민이 쉽고 편리하게 쓸 수 있도록 개발된 문자가 아니었다. 한자를 사용하는 지배신분의 사람들이 동시대 중국의 기준에서 정확한 중국어를 구사하고 훌륭한 외교문서를 작성하고 아름다운 시문을 지을 수 있도록 개발된 발음기호였다.
세종은 그 발음기호 43자를 가지고 맨 먼저 '고금운회'와 '홍무정운'이라는 중국의 운서를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뒤이어 조선의 한자 발음을 중국식으로 표준화하는 '동국정운'이란 운서를 편찬하였다. 다시 말해 세종은 당대 조선의 한자음을 중국식으로 개조하는 엄청난 작업을 벌인 셈이다. 이 거대한 문화사업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1448년에 편찬된 '동국정운'은 음운의 체계에서 당대 조선의 언어생활과 너무나 동떨어졌으며, 이에 결국 폐기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훈민정음이 표음문자로 생존한 것은 변음토착에 성공한 덕분이었다. 세종의 차녀인 정의공주가 그 일에 공로가 컸다. 변음이란 기존의 이두처럼 한자의 뜻을 빌려 표기하던 것을 버리고 직접 소리나는 대로 표기함을 말한다. 예컨대 무엇이다의 '이다'는 이두로 '시여是如'라고 썼는데, 이제 그 음을 바꾸어 '이다'로 쓰는 것이다. 토착은 조선어에 고유한 토를 마찬가지 방식으로 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한문 밖의 일상의 조선어도 표기할 수 있음이 확인되자 훈민정음은 더 이상 발음기호가 아니라 표음문자로 바뀌어 보급되어갔는데, 그것을 가리켜서는 언문이라 하였다.
학계라 해도 집단연고의 무리
이상, 정광 교수의 '한글의 발명'을 간략히 소개하였다. 정광 교수의 연구 대상은 훈민정음만이 아니라 중국 주변의 표음문자들을 망라하고 있다. 원이 반포한 파스파문자는 그로 쓰인 문헌과 금석이 명 태조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된 연유로 온전하게 전하지 않는다. 정광 교수는 여러 문헌을 섭렵하여 파스파문자의 전모를 복구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이유로 세계의 관련 학계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듯하다. 내가 정광 교수를 신뢰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표2]는 정광 교수가 복구한 파스파문자 33개와 훈민정음의 자모 32개를 발음기관과 음의 청탁에 따라 분류하고 대조한 것이다. 나는 두 문자의 음성 구조가 완벽하게 일치함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다시 말해 1443년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는 173년 전에 원이 개발하고 초기의 조선왕조도 사용한 파스파문자의 원리에 충실하였다. 다만 그 자형만큼은 창조적이라고 정광 교수는 지적하고 있다.
훈민정음의 창제와 보급에는 여러 대군, 공주, 불가의 학승, 집현전의 학사, 사역원의 역관이 참가하였다. 세종의 관심은 컸고, 그가 직접 기여한 바도 없지 않을 터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종의 훈민정음을 손수 창제했다고 하면 지나치다. 하루하루 수많은 정사에 시달리는 군왕이 고대 인도에서 발원하여 여러 민족의 표음문자와 방대한 불경으로 녹아든 복잡한 음성학의 원리를 홀로 터득하거나 개발하기는 불가능하다. 그의 의지와 후견으로 제작이 추진되고 그의 이름으로 반포된 문자라 해도 충분하다.
정광 교수의 파천황과도 같은 학설을 두고 국어학계가 어떻게 반응하는가 궁금하여 관련 학술 사이트를 뒤졌더니 의외로 조용하다. 적극적으로 그에 동조하거나 비판하는 논문이 보이지 않는다. 국어학계의 주류는 냉담한 듯하다. 정광 교수는 책의 곳곳에서 자기의 주장에 대해 믿을 수 없다고만 하지 말고 근거를 제시하면서 반론을 펼치라고 관련 연구자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내겐 그 말이 나의 파스파문자 복원이 잘못되었는지 검증하라는 뜻으로 들린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에서 '사회'라 하면 집단연고의 무리이다. 학계라 해서 연구자들이 높은 자존심과 명예감으로 새로운 학설을 공정하게 평가한다고 여기면 큰 오산이다. 한국의 학계는 아직 그런 수준에 도달해 있지 않다. 무슨 이야긴가 하면, 비록 큰 호응은 없지만, 오히려 그 이유로 정광 교수의 학설은 신뢰할 만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훈민정음은 당초 조선의 지배층이 중국어를 보다 정확히 구사할 수 있도록 발음기호로 고안된 문자였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반포하면서 어린 백성을 위해서라고 한 그 백성은 한자를 사용하는 대부와 사의 신분층을 말하였다.
최만리의 반대
훈민정음이 반포되자 집현전 부제학인 최만리를 비롯한 몇 사람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이유를 보면 첫째는 우리 조선은 지성으로 대국을 섬기어 중화의 제도를 준행해왔는데, 이제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이 사실이 중국에 흘러 들어가 비난을 받게 되면 대국을 섬기는 데 부끄러움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중국 밖의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 등과 같은 오랑캐는 각각 자기 문자가 있는데, 우리가 만약 한자를 버리고 독자의 글자를 갖게 되면 저들 오랑캐와 무에 다를 것이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이하 몇 가지 이유가 더 있는데 언급을 생략한다.
세종이 한국사 제1의 위인으로 받들어지게 된 데에는 이 같은 최만리 등의 반대 상소가 큰 역할을 하였다. 그들이 내건 명분은 누가 봐도 고리타분한 골수 사대주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 반대를 물리쳤으니 세종은 두 말할 여지없이 건강하고 진취적인 민족주의자다. '세종실록'을 보면 최만리 등의 반대 상소에 접한 세종은 그들의 주장이 임금을 무시하고 논리가 맞지 않음에 화를 내어 그들을 하룻밤 의금부에 가두었다가 풀어주었다. 더 이상의 심각한 분란은 있지 않았다. 세종 26년 당시의 권력구조에서 세종에 맞설 신하들의 권리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임금과 신하의 대립을 극적으로 부풀려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소설이 있다. 이정명의 '뿌리 깊은 나무'가 그것이다. 70만 명이나 읽고 SBS의 사극으로도 크게 히트한 작품이다.
소설에서는 사대주의와 전통 유학에 충실한 기득권 세력의 경학파와 민족주의와 실학을 추구하는 혁신 세력의 실용파가 대립을 벌이고 있다. 최만리 등은 경학파이고 세종과 집현전 학사는 실용파이다. 경학파는 실용파의 한글 창제가 사대주의를 허물고 민중의 정치의식을 일깨워 그들의 기득권체제를 무너뜨릴 것을 두려워한다. 경학파는 자객을 파견하여 실용파를 차례로 암살하고 심지어 세종의 목숨까지 노린다. 소설은 그 같은 경학파의 음모, 암살, 반역을 추적하고 진압하는 젊은 수사관의 활약을 그리고 있다.
이 소설의 배경 설정이나 스토리 전개가 얼마나 황당한가를 여기서 논하지는 않겠다. 잘못된 역사소설은 몇 세대를 두고서도 치유하기 힘든 깊은 상처를 남긴다. 언젠가 이 '환상의 나라' 시리즈의 다른 곳에서 민족주의 역사소설의 폐해에 대해 자세하게 논할 계획이며, 그때 지금의 '뿌리 깊은 나무'에 대해서도 언급할 것이다. 어쨌든 최만리 등의 반대 상소는 후대의 소설가에게 독자를 열광시키기에 충분할 정도의 드라마틱한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소중화의 주체성
세종과 최만리의 입장 차이와 관련해서는 조금 난해하지만 정다함의 '中國과 國之語音의 사이'라는 논문을 읽어보도록 독자 여러분께 권하고 싶다. 그에 의하면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는 언어와 문자의 불통으로 생겨난 조선과 명의 긴장 관계를 해소하고 중화라는 광역적인 국제질서와 문화를 조선왕조가 섭취하고 내면화하는 과정이자 수단이었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결국 중화로 향한 소중화 조선왕조의 주체성 내지 능동성의 발로였다.
실제로 '왕조실록'을 보면 조선이 명에 보낸 외교문서에 명이 읽기에 명을 능멸하는 표현이 있어서 명 태조가 조선의 사신을 감금하고 문서를 쓴 사람을 잡아 보내라고 하여 심각한 긴장이 발생한 적이 있다. 조선 태조 연간의 일이다. 세종 연간에는 명이 '일동一同'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는데, 조선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되묻기도 하였다. 한번은 명으로 표류한 조선인의 이름을 적은 문서가 왔는데, 도무지 조선식 이름이 아니어서 조선은 명에 그들을 심문할 사신을 파송할 수밖에 없었다.
정다함과 같은 새로운 시각에서 최만리 등을 평가하면 그들은 꽉 막힌 국제감각의 소지자로서 소극적이며 방어적인 사대주의자였다. 그들의 고식적인 사대주의에서 문자는 한자 하나만으로 충분하였다. 그에 비하자면 세종은 활짝 열린 국제감각의 소지자로서 중화의 질서를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수용하고 내면화하는 정책을 펼쳤다.
전술한 대로 세종은 조선왕조의 국가체제를 천자를 정점으로 하는 예의 국제질서로 정비하였다. 그렇게 중화의 세계로 깊숙이 진입해가기 위해서는 언어, 문자 생활마저 중화의 기준으로 교정할 필요가 있으며, 그를 돕는 보조문자가 필요하였다. 다시 말해 세종의 한글 창제는 15세기적 국제질서에서 조선왕조가 소중화로서 추구한 개성적인, 그래서 역설적으로 민족주의적이기도 한, 문화정책이었다.
이영훈 교수의 환상의 나라_ 1.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