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모든 것과 거리 두기_ 정여울
중년, '내면의 형상'을 찾는 시기
런던에서 잘나가던 증권투자자가 그림을 그리겠다며 하루아침에 가족과 명예와 부마저 내팽개쳐 버린 이야기, '달과 6펜스'를 읽으며 나는 망연자실했다. 소설 속 화가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결코 그런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의 예술을 위해 가족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그 이기심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재능이 축복이면서도 저주였다. 솔직히 제발 나에게는 이런 저주가 내려지지 않기를 바랐다. 우리는 모두 자신에게 뛰어난 재능이 있기를 바라지만, 이렇듯 삶을 파괴해 버리는 재능이 반갑지만은 않다.
하지만 모든 재능에는 사실 이런 파괴적인 속성이 있다. 그 파괴의 정도나 깊이가 다를 뿐. 나 같은 회색분자들은 50퍼센트쯤의 재능과 50퍼센트쯤의 행복을 선택하고 싶어 하지만, 주인공 스트릭랜드는 100퍼센트의 재능과 0퍼센트의 행복을 선택한다. 그는 예술을 위해 자신의 삶 전체를 불살랐다. 어린 시절에는 '달과 6펜스'가 아름답고 멋져 보였는데, 어른이 되어 읽으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내개 이런 재능이 없다는 것을 이제 명백히 알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런데도 이 천재 화가의 불꽃같은 삶이 여전히 눈부시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머싯 몸(1874-1965)은 스트릭랜드를 잘못된 장소에서 태어난 사람, 어울리지 않는 사회에 속해 있던 사람, 그리하여 타히티라는 원시 낙원에서 마침내 원초적 고향을 찾은 사람으로 묘사한다. 그래서 이 작품을 읽으며 기도했다. 나는 내가 태어날 곳이 아닌 데서 태어난 것이 아니기를, 어딘지 모를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내 평화로운 삶을 저당잡히지 않기를. 가족 사이에서조차 평생 이방인처럼 살고, 아무리 친숙한 곳이라도 늘 낯선 곳인 것처럼 서먹서먹하게 여기는, 그런 저주가 내려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천재적인 재능을 지니지 못했다 하더라도, '내가 속할 곳이 아닌 곳에 억지로 속한 느낌'은 사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어 보는 삶의 문제다. '달과 6펜스'는 단지 '평범한 삶을 살다가 예술에 눈 뜬 천재 화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중년의 위기'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읽을 수 있다.
성공한 중년 남자 스트릭랜드는 겉보기에는 삶의 전성기를 맞았지만, 내면에서는 엄청난 고독과 분열을 느꼈을 것이다. 이 중년의 위기를 어떻게 넘기느냐에 따라 개인의 삶은 천양지차로 달라진다. 내 눈에 비친 중년은 '인생의 향방을 바꾸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다. 특히 잘못된 인생행로를 완전히 급선회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가 바로 중년이다. 노년에도 물론 인생의 향방을 바꿀 수 있지만, 체력적인 면이라든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대한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중년기에는 마음이 어느 때보다 성숙하고, 몸도 여전히 팔팔하다. 중년은 자신을 가장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기다. 청년기에는 뭐든 할 수 있다는 객기도 부려 보지만, 중년이 되면 내가 무엇을 잘 해내고 무엇을 잘 못하는지를 안다. 절망이 무엇인지 알고, 희로애락의 극단도 경험했으며, 게다가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여 본 적도 있는 중년이라면 더욱 '인생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많다.
스트릭랜드는 인생을 바꿀 이 절호의 기회를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제야 발견한 자신의 진짜 재능을 갈고 닦기 위해서는 1분 1초도 아까웠을 것이다. 그동안 쌓아 온 모든 삶을 단칼에 버릴 수 있었던 이유도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절박한 내면의 고통' 때문이었다.
카를 구스타프 융은 '중년의 위기'에 관심을 기울인 최초의 심리학자였다. 융 자신이 바로 중년의 위기를 호되게 겪었다. 프로이트는 주로 유년기에 관심을 가졌고, 성인을 치료할 때도 '유년기 트라우마'에 집중했으며, 중년이나 노년의 환자는 '돌이키기 힘든 나이'라는 이유로 치료를 꺼리기도 했다. 하지만 융은 중년의 환자들을 환영했고, 그들의 심리적 고통을 치유하는 것이 인간 삶에서 매우 중요한 과제임을 깨달았다. 융은 프로이트와 심한 갈등을 겪었지만 그 갈등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자신의 길'을 찾았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몽상과 꿈을 일일이 기록하면서 자기만의 심리학적 과제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융은 '기억, 꿈, 사상'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면의 형상을 찾던 그 시기는 내 인생에서 최고로 중요한 시기였다. 그 시기야말로 중요한 모든 것들이 결정되는 시간이었다." 청년기가 사회와 가족 안에서 자신의 '외적인 형상'을 찾아가는 시기라면, 중년기는 자신의 삶에서 '내면의 형상'을 찾는 시기다. 이 '내면의 형상'을 찾는 데 실패하면, 삶은 세속적인 성공이나 물질적인 이득만을 향해 치닫거나 돌이킬 수 없는 타락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스트릭랜드는 '예술가로서의 자아'를 창조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완전히 포기했다는 점에서 완벽한 모델이 아니다. 특히 스트릭랜드가 세 여인의 삶을 파괴하는 과정에는 도저히 공감할 수가 없다. 그는 가족을 완전히 버림으로써 아내의 행복을 파괴했고, 자신을 사랑했던 유부녀 블란치에게서는 남편의 사랑은 물론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했으며, 타히티에서 만난 원주민 처녀에게도 결코 좋은 남편이 되어 주지 못한 채 그녀를 마음대로 부려먹었다.
'달과 6펜스'는 철저히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서 '예술가의 재능'을 예찬한다. 하지만 문학적으로는 훌륭하나 심리학적으로는 논쟁적일 수밖에 없는 이 작품 속에서 나는 '중년의 위기'라는 문제의 본질을 본다. 스트릭랜드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는 없지만, 우리 모두에게 언젠가 닥칠 중년기에는 '봉인의 시기'가 필요하다. '사회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한 긴장감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간과 공간'을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
우리는 익숙한 공간, 한정된 시간, 지금까지 '나다운 것'이라 믿어 왔던 세계의 매트릭스에서 단 며칠만이라도 벗어나 봐야 한다. 가능한다면 정기적으로 '자기로부터의 탈주'를 꿈꾸는 시간을 짧게라도 가져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거대한 조직사회나 자본의 톱니바퀴가 굴리는 대로 굴러가거나, 가족이라는 블랙홀에 빠져 진정한 '나'를 찾을 길이 없어지게 된다.
미국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1908-1970)는 '창조성'의 비밀을 '혼자 있을 수 있는 힘',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오직 이곳에만 존재할 수 있는 고도의 집중력에서 찾았다. 매슬로는 '인간 본성의 탐구'에서 이렇게 말한다. 창조적 열정을 지닌 사람은 과거는 물론 미래까지 잊고 오직 그 순간에만 몰두한다고. 자기 자신에게서조차 벗어날 수 있는 사람, 공간과 사회와 역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창조적인 사람이라고. 스트릭랜드는 진정 창조적인 인간이었다. "당신은 삼류 화가 이상은 되지 못할 것"이라는 냉정한 충고를 듣고도 오직 그림에만 집중하는 스트릭랜드의 모습은 다시 읽어도 눈물겹다. "나는 어쨌든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는 못 견디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는 문제가 되지 않소. 우선 헤어 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러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창의적인 사람은 '익숙한 모든 것과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다. 나, 가족, 시간, 공간, 사회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 동시에 창의적인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지금 이 순간'에 완전히 자신을 던질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다. '중년의 위기'를 '창조성의 원천'으로 바꿀 수 있는 최고의 비법은 바로 세상에 완전히 초연할 수 있는 담력이다. 자신을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완전히 내던질 수 있는 용기, 그것이야말로 '인생 제2막'을 시작하는 힘이다.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_ 정여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