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광 아버지의 책 숙제_ 신철식
시대의 흐름을 꿰뚫어보는 식견과 통찰은 광범위한 독서에서 나오는 법이다. 아버지는 늘 말했다.
"독서에서 얻는 방대한 양의 지식은 세상의 무엇보다 값진 것이다."
아버지는 독서광이었다. 신문은 <월스트리트저널>, <뉴욕타임스>, 주간지는 <뉴스위크>, <타임>, <이코노미스트>, 월간지는 일본의 <문예춘추>와 <중앙공론> 등 시사지 수십 종을 정기구독하면서 별도로 단행본을 읽어나가느라 늘 바쁘게 지냈다. 약속 없이 집에 있는 날에는 밀린 책을 읽느라 시간이 모자랄 정도였다.
읽는 속도도 매우 빨랐다. 책을 하도 많이 읽다 보니 저절로 속독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페리 메이슨> 시리즈 같은 영어 소설은 대각선으로 한번 주욱 보면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고 했다.
독서 분야도 다양해서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역사, 문화, 과학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두루 책을 읽었다. 주로 일본어나 영어로 된 외서들이었다. 독서법도 자유로웠다. 모든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정독하는 것이 아니었다. <문예춘추>라고 해도 읽을 만한 부분만 뽑아서 읽었다. 새 책도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은 대목은 건너뛰고 읽을 만한 부분만 찾아서 읽었다.
정독을 요하는 역사서의 경우는 몇 가지 관점에서 서술된 책들을 모두 구해 읽었다. 일본의 이와나미문고가 세계사 32권을 한 질로 펴낸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했다. 이와 달리 약간 좌파적 입장에서 쓴 신조사의 12권짜리 세계사도 꼼꼼히 다 읽었다. 특정 사건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으면 여러 관점에서 서술된 책들을 꺼내놓고 필요한 부분을 찾아 대조하며 읽었다.
옛날부터 아버지가 책을 많이 읽는다는 소문이 나서 책 선물도 많이 받았다. 직원들은 해외출장을 가면 으레 책을 선물로 사 오곤 했다. 아버지 역시 외국에 출장을 가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서점에 들러 책을 고르는 일이었다. 책 사는 것 외에는 절대 외화를 쓰지 않았다. 담배도 한국 담배를 보루로 사들고 가서 피웠다.
아버지와 삼성 이병철 회장은 좋은 책친구였다. 괜찮은 책은 서로 권하기도 하고, 좋은 책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기도 했다. 나와는 책을 매개로 한 사제관계였다.
나는 20대부터 30년에 걸쳐 일주일에 한두 권씩 그런 독서 숙제를 받으며 살았다. 한 번 준 책은 반드시 다음 번 주말 식사 자리에서 화제로 삼았다. 단순히 책 내용만 이야기하고 지나간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항상 내게 질문을 해서 지식과 식견을 시험했다.
공무원 생활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아버지가 낸 책 숙제는 반드시 해냈다. 아버지와 저녁식사를 하는 날은 술을 아무리 많이 마시고 들어와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자칫 빈틈을 보였다간 엄청난 질책이 떨어질 뿐 아니라 어머니에게까지 불똥이 튀기 때문이었다.
자식들이 차례로 결혼하면서 주말의 저녁식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났다. 그러나 아들인 나를 붙잡고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습관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더 심해진다는 느낌이었다. 웬만하면 의사인 사위들의 관심사를 고려해서 화제를 선택할 법도 한데 아버지는 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
식탁에 앉아 꺼내는 이야기라는 게 전부 나랏일 아니면 세계정세, 과학, 역사 같은 것들이었다. 누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처가에 식사하러 온 의사 사위들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맞장구를 치며 대화에 끼어들려 하면 핀잔을 놓기 일쑤였다.
"알지도 못하는 소리 하고 앉아 있다."
"이래서 의사들이 문제라니까."
게다가 아버지는 보건사회부장관을 지낸 터라 의료 정책이나 의사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그때 참 매형들이 재미없는 자리에서 밥상머리 교육을 받느라 고생이 많았다.
아버지와 나를 제외한 다른 식구들은 대부분 먼저 식사를 마치고 일어섰다. 아버지는 다른 식구들이 먼저 일어서는 것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직 아들인 나만 있으면 되었다. 나는 아버지의 반주와 식사가 끝날 때까지 짧으면 2시간, 길면 4시간을 꼬박 앉아 있어야 했다.
아버지는 청주를 즐겼다. 여름에는 차게 겨울에는 따뜻하게 마시는 걸 좋아했다. 두 되들이 청주 한 병을 주전자에 부어 둘이 마시다 보면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시간 여유가 있을 때는 두 병까지도 마시면서 서로 쟁쟁하게 토론을 했다. 그렇게 마시고도 긴장을 늦추거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틀린 소리를 하면 곧바로 질책과 호통이 날아오기 때문이다.
평소 그렇게 훈련이 되다 보니 밖에서 술을 마시고 실수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국회든 언론이든 타 부서와 업무차 협의든 회식 자리에서 만취해본 일이 없다. 술자리가 끝난 뒤 술값 계산하고 사람들 상황 살펴서 보내는 일은 사무관 때부터 차관 때까지 늘 내 몫이었다. 그 바람에 공직을 그만둘 때는 나도 몸이 상해 있었다. 스스로 타고난 건강 체질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신현확의 증언_ 신철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