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성찰

삶을 지겹게 만드는 방법_ 강신주

정정진 2016. 12. 26. 15:51


삶을 지겹게 만드는 방법


놀이의 권리를 찾아서


아이가  게임을 하지 않도록 만드는 방법은 있을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기 위해 우리가 먼저 숙고해야 할 것이 있다. 왜 아이는 그렇게도 게임에 몰두하는가? 글자 그대로 게임은 놀이이기 때문이다. 요한 하위징아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인간이 얼마나 놀이에 매료되는지 어렵지 않게 납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놀이의 어떤 특성이 인간을 그렇게 사로잡는 것일까. 노동과 대조했을 때 놀이는 자신의 특성을 분명히 드러낸다. 철학적으로 노동은 행위의 수단과 목적이 불일치한 것으로, 반대로 놀이는 행위의 수단과 목적이 일치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예를 하나 들어 볼까.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음주는 놀이일 수 있지만, 직장 상사와나 거래처 사람과의 회식 자리에서 음주는 노동일 수밖에 없다. 친구 사이에서 음주행위는 그 자체로 수단이면서 동시에 목적이지만, 업무상 이루어지는 음주행위는 술이 수단이고 친말한 관계 확보나 계약 달성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놀이를 좋아하고 노동을 싫어하는 법이다. 이것은 놀이가 자유의 성격을 갖고 있다면, 노동은 자의반 타의반 강요의 성격을 갖는다는 사실과 밀접히 관련된다. 놀이는 참여자가 어느 때이든 원하면 그만둘 수 있다. 반면 노동은 함부로 그만두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친구와 술 마시는 것보다 사업상 술 마시는 것이 힘든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친구와 술을 마시다가 언쟁이 붙으면, 술자리를 피하고 나오면 된다. 술자리 자체가 놓이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업상 만난 거래처 사람이 불쾌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술자리를 파하고 나올 수는 없다. 술자리는 그 자체 목적이 아니라 계약의 성사를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느 누가 거래처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하위징아가 인간을 '호모 루덴스', 그러니까 놀이하는 인간으로 정의 내린 것도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인간은 수단과 목적이 일치되는 행동을 지향하는 존재, 그러니까 자유를 지향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으니까.


이제 게임에 몰두하는 아이를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분명해지지 않았는가. 아니, 정확히 말해 게임이라면 아이가 경기를 일으키도록 만드는 방법이 보이지 않는가, 게임을 놀이가 아니라 노동으로 만들어 버리면 된다. 같은 말이지만 게임을 자유롭게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하도록 시키면 된다. 예를 들어 게임에서 10만 점의 점수를 얻어야 밥을 준다고 어머니가 제안, 아니 강요하는 것이다. 이 순간 게임을 하는 행위는 밥을 먹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당연히 게임은 이제 곤혹스러운 노동이 된다. 아니면 지금부터 하루에 다섯 시간씩 반드시 게임을 해서 프로게이머가 되어야 한다고 아이에게 주문해도 좋다. 이전에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게임에 몰입했던 아이도 다섯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연신 시계를 쳐다보게 될 테니까. 이제 수단이자 목적이었던 게임이 프로게이머가 되기 위한 연습으로 변질되었으니까 말이다.


여기서 놀이와 관련된 오해 두 가지를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첫 번째 오해는 놀이란 무엇인가 무위도식하는 것이라는 편견이다. 간단한 사례로 첫 번째 오해는 금방 해소될 수 있다. 설악산 대청봉에 오를 때 놀이로 오를 수도 있고, 아니면 노동으로 오를 수도 있다. 마음 맞는 친구들과 대청봉에 오르면, 중간중간 힘들어도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즐겁게 오를 수 있다. 놀이로서의 산행이다. 이와는 달리 회사 단합대회 차원으로 CEO를 포함한 전 사원이 대청봉으로 오를 수도 있다. 결코 즐겁지 않은 산행, 일종의 노동으로서의 산행이 벌어진 것이다. 산행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산행을 좋아하는 CEO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것, 혹은 조직에서 튀지 않으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노동으로서의 산행과는 분명 구별되지만, 놀이로서의 산행은 무위도식과는 아무런 상관없다는 것이 중요하다. 좌우지간 친구들과 산행을 해도 대청봉 등정은 정말 똥구멍이 빠지도록 힘든 일이니 말이다.


두 번째 오해는 첫 번째 오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것은 놀이란 노동을 잠시 잊고서 술과 음악에 몸을 맡기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한마디로 놀이란 노동에 지친 사람들의 재충전 활동이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따르면 "열심히 일한 자여! 떠나라! 그리고 즐겨라!" 라는 표어에 부합하는 행동을 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겉으로 아무리 놀이라고 보여도 결코 순수한 놀이일 수는 없는 법이다. 대학생들이라면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끝난 뒤 클럽에서 광란의 밤을 보내는 것, 직장인들이라면 프로젝트가 마무리 된 1차, 2차 등으로 이어지는 밤 문화를 보내는 것이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여흥이나 스트레스 해소는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단지 과거의 노동을 위로하려는 수단, 혹은 새로운 노동을 위한 준비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하긴 노동의 대가로 얻은 돈을 서비스업의 서비스를 구입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어떻게 놀이일 수 있다는 말인가.


지금은 자본주의적 삶의 가치가 공동체뿐만 아니라 우리의 내면까지 지배하고 있는 불행한 시대다. 이제 돈이 모든 행위의 지고한 목적, 거의 유일하기까지 한 목적으로 신격화된 것이다. 그 결과 우리를 몰입시켰던 놀이의 영역은 점점 더 줄어들어 가고 있다. 중, 고등학교 학생들이 책이 아니라 교재를 읽기 시작한 지도 상당히 오래되었다. 마치 게임처럼 뜬눈으로 밤을 세우게 했던 독서는 수단과 목적이 일치되는 행위인 반면, 학교나 학원에서 교재를 읽고 암기하는 행위는 더 좋은 상급학교 진학이라는 목적에 종속되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고등학교 공부가 입시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는 순간, 고등학생들은 젊은 창조성을 잃어버리고 고달픈 지적 노동자로 전락하게 된다. 하루빨리 그리고 가장 효과적으로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하지 않으면 고단한 노동에서 벗어날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대학 입학이 목적이기에 대학 측에서 학생을 선발할 때 요구하는 것들을 미리미리 준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학업 성적 증명서, 기타 과외 활동 증명서, 그리고 수능 성적 증명서만 갖추면 된다. 이런 증명서들이 입시를 결정하기에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이 동원될 여지가 생긴다. 해당 과목에 흥미가 없거나 들키지 않고 부정행위를 하더라도 성적만 좋으면 된다. 과외 활동에 별다른 열의가 없거나 심지어 실제로 하지 않았더라도 과외 활동을 했다는 증명서만 있으면 된다. 흥미로운 일 아닌가. 수단과 목적이 분리되어 그 틈이 더 크게 벌어질수록, 그만큼 비리와 편법이 침입할 수 있는 개연성은 더 커지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정당한 목적이라도 수단이 정당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말은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주장일 뿐이다. 공부를 지적 놀이가 아니라 지적 노동으로 변질시키지 않았다면, '정당한 수단'이란 말 자체가 나올 수도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지적 놀이의 공간을 제공했던 대학이나 대학원마저도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취업이란 절박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이제 우리 대학생들은 자신이 선택한 전공의 학문을 평생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지적 놀이의 장으로 생각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들에게 전공 영역은 고소득 직업을 얻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학에서 전공 과정은 수단과 목적이 일치되는 학문 영역, 그러니까 지적 놀이여야만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대학에서 독창적이고 비판적인 지성인이 탄생할 수 있는 법이다. 마치 게임을 하는 것처럼 밤을 세워 가며 공부에 몰두했을 때 어떻게 창조적인 지성인이 나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마 지적 놀이에 몰입했던 대학생은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대학원이란 상급학교에 진학하게 될 것이다. 너무나 재미있었던 공부와 연구를 학부 과정 동안에만 국한시킬 수는 없는 일이니까.


지적 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논문과 학위는 하나의 결과물, 그러니까 놀이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에게 논문과 학위는 기쁨의 대상이기는커녕 심지어 슬픔의 대상이기까지 하다. 논문을 쓰고 학위 과정을 마치는 순간, 그래서 마침내 대학이나 대학원을 떠나는 날, 그들은 자신을 매혹시켰던 놀이 영역과 작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힘들었지만 즐거웠던 시간을 추억으로 남기는 것보다 슬픈 일이 또 있겠는가. 그렇지만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작게나마 존재했던 지적 놀이의 장으로서 대학은 사실상 거의 죽어 버리게 된다. 지적 놀이의 결과물에 불과했던 학위가 승고한 목적으로 승격해 버린 것이다. 물론 논문이나 학위가 이렇게 신격화된 이유로는 학위가 일종의 스펙으로 기능하는 풍조도 한몫 차지한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미 자본주의 논리에 편입된 대학 측이 학위를 돈만 있으면 언제든지 구매할 수 있는 매력적인 상품이라고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명문대부터 널리 알려지지 않은 대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대학의 대학원 과정을 들여다보라. 얼마나 기묘한 대학과 대학원 과정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는지를, 그리고 얼마나 용이하게 학위가 매매되는지를. 학위를 쉽게 받을 수 있다는 불문율을 믿고 입학은 했지만, 지적 놀이가 아니라 지적 노동으로 논문을 쓴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수업료 등으로 지출한 비용을 생각핳면 논문 작성을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다. 마침내 논문 표절과 대필이 성행할 수밖에 없는 조건은 모두 갖추어진 셈이다. 그래서일까. 이제 아예 논문 표절과 대필 문제는 연례행사처럼 반복되고 있다. 이 와중에 정당한 수단만이 가치 있다는 원론적인 논의나 엄격한 논문 검증 방식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도처에서 들린다. 그렇지만 논문 표절과 대필 사건을 방지하는 유일한 방식은 자본에 맞서서 놀이가 가져다주는 창조적 즐거움을 회복하는 것이다. 수단과 목적이 일치되는 자발적인 행동 앞에서 대필이나 표절과 같은 불미스러운 일은 발을 붙일 수조차 없을 테니까 말이다.


비상 경보기_ 강신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