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색이 영롱한 구슬_ 퇴우정념
마음의 구조를 조금 더 면밀히 살펴보겠습니다.
<원각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선남자여,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몸과 마음이 다 환상의 때이니,
때가 아주 없어지면 시방세계가 맑고 깨끗하니라,
선남자여,
비유하자면 맑고 깨끗한 보배구슬에서
영롱한 오색이 빛나 방향을 따라 제각기 나타나면
어리석은 사람은 그 보배구슬에
실제로 오색이 있는 줄 아는 것과 같다.
선남자여,
맑고 깨끗한 성품인 원각이
몸과 마음을 나타내어 종류를 따라
제각기 응할 때에 어리석은 사람이
맑고 깨끗한 원각에
이러한 몸과 마음의 모습이 실제로 있다고
말하는 것 또한 그와 같으니라.
우리의 마음도 오색이 영롱한 보배구슬과 같고, 부처님의 마음도 오색이 영롱한 보배구슬과 같습니다. 그럼 부처님과 중생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원각경>에서 하신 말씀처럼 그 영롱한 오색을 보배구슬의 속성으로 보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입니다. 다양한 빛깔을 보배구슬 자체의 속성으로 보는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상상해보세요. 찬란한 그 빛은 무지개를 닮았습니다. 다이아몬드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색상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파란빛이 보이지만 다이아몬드 속에 파란색이 있습니까? 노란빛이 보이지만 다이아몬드 속에 노란색이 있습니까? 다이아몬드는 그저 인연 따라 다양한 색깔을 드러낼 뿐입니다. 분명히 눈에 보이지만 어느 것도 그 속에는 없습니다. 만약 다이아몬드 속에 그런 색깔이 있다고 여긴다면 그를 어리석은 사람이라 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와 같습니다. 분명 기쁘고, 슬프고, 억울하고, 통쾌하고, 답답하고, 편안합니다. 분명 미워하고, 사랑하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괴로워하고, 즐거워합니다. 분명 옳다고 생각하고, 그르다고 생각하고, 훌륭하다 생각하고, 못났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온갖 감정과 생각이 머무는 곳은 없습니다. 마음은 그저 인연 따라 온갖 감정과 생각을 드러낼 뿐입니다. 분명히 느끼고 생각하지만 그 실체는 없습니다. 만약 감정과 생각이 안에 있다가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처럼 여긴다면 그를 어리석은 사람이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나는 기뻐"라고 말하고, "나는 슬퍼"라고 말합니다. 그럴 때 그 기쁨과 슬픔이 곧 나의 속성인 것처럼 여깁니다. 그건 착각입니다. 마치 파란색이나 붉은색을 보배구슬의 속성으로 착각하듯이 말입니다. 보배구슬을 깨뜨려보아도 거기에 파란색이나 붉은색은 없습니다. 이처럼 착각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기에 어리석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슬픈 나', '괴로운 나'가 실제로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착각입니다. 그런 나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연 따라 파란색이나 붉은색이 나타나지만 실제로 '파란색 구슬', '붉은색 구슬'은 존재하지 않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환상이라고 하고, 허깨비와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명확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본래 맑고 깨끗한 보배구슬과 같다는 것을 알면 그가 곧 부처님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망각하고 우리의 마음을 파란색 구슬이나 붉은색 구슬처럼 여기면 그가 곧 중생입니다.
이런 중생의 어리석음, 착각은 고집을 동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눈에는 분명히 파란색 구슬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그건 파란색 구슬이 아니야, 그 구슬은 본래 맑고 깨끗해"라고 말해주어도 믿지를 않습니다. 믿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도리어 역정을 내면서 따집니다.
"너는 눈도 없냐?"
이런 중생의 고집은 다툼을 야기합니다. 왜냐하면 똑같은 구슬이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른 색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옆 사람이 "저건 붉은색 구슬이야"라고 하면 콧방귀를 뀌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눈이 삐었냐?"
착각은 고집을 낳고, 고집은 다툼을 낳고, 다툼은 눈물과 상처를 남깁니다. 이것이 중생들의 삶입니다. 눈물과 상처만 가득한 중생의 삶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본래 맑고 깨끗한 보배구슬과 같다는 것을 사실 그대로 알면 됩니다. 아는 사람은 고집부리지 않고, 고집부리지 않는 사람은 다투지 않고, 다투지 않는 사람은 눈물과 상처를 남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삶입니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생각과 감정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바탕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늘을 한번 바라보세요. 파란 바탕 위로 수많은 구름들이 흘러갑니다. 뭉게구름, 먹구름, 양떼구름, 또 때로는 무지개도 뜹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오래 머물지 못합니다. 잠시 모습이 나타났다가 사라져갑니다. 하지만 그 바탕인 하늘은 늘 맑고 푸릅니다. 먹구름이 짙어도 하늘은 잿빛에 물들지 않고, 무지개가 떠도 하늘은 오색으로 물들지 않습니다. 하늘은 본래 맑고 푸를 뿐입니다. 마음의 바탕도 그와 같습니다.
바탕인 하늘에 주목하는 삶은 안정되고, 평온하고, 넉넉하고, 너그럽습니다. 그 맑고 푸름은 손상되지도, 손상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끝없이 생겼다 사라지는 구름과 무지개에 주목하는 사람은 한번 웃었다 울었다 하는 불안정한 삶을 피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어디에 주목하시겠습니까?
생겼다 사라지는 구름과 무지개를 붙잡으려 애쓰는 사람은 원망과 슬픔에서 헤어날 길을 찾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바탕인 하늘에 주목하는 사람은 기적처럼 찾아와 준 순간에 감사하고, 가뭇없이 사라짐을 담담히 받아들입니다. 당신은 어디에 주목하시겠습니까?
출가학교 11기에 참여했던 박소연 님의 아버지는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큰 딸을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딸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하늘로 띄우는 편지>
11월 5일, 네 유골을 안고 해거름 전망대를 다녀왔단다.
파도는 여전히 검은 돌 틈에서 부서지고,
푸른 바다 멀리로 배들이 떠다니더구나,
그래, 너는 이 바다를 무척이나 좋아했지.
네가 가고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세상은 돌아가고 있단다.
우리가 가고도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또 돌아겠지.
그래, 눈물이 무슨 소용이냐. 이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인연의 진리를 되씹으며 이젠 슬픔에서 벗어나련다.
그날 얼마나 놀랐니.
아빠 엄마는 너를 보내고 49일 동안 금강경을 사경했단다.
네 덕분에 우리가 공부를 다시 시작하는구나. 고맙다.
한없이 착하기만 했던 딸아, 잘 가거라.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지만 우리는 너를 보내주련다.
너도 이생의 아픔을 모두 잊고 좋은 곳으로 가거라.
우리의 인연이 여기까지인가 보다.
이제 더 이상 슬퍼하지 않으련다.
너는 순간을 머물다 아쉽게 세상과 멀어졌지만
우리에게 너는 눈물이 아니라 미소로 남는단다.
곁에 잠시 머물러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존재란다.
딸아, 잘 가거라.
아빠 엄마는 여전히 널 사랑한단다.
출가학교_ 퇴우정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