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은 풍요롭고 마음이 가난한 세상_ 퇴우정념
겨울이면 이곳 오대산에는 눈이 많이 내립니다. 허리춤까지 쌓인 눈을 바라보노라면 봄이 언제 오려나 싶습니다. 하지만 햇살이 따뜻해지기 시작하면 그 두꺼운 눈밭에서 온갖 식물들이 제각기 새싹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언 땅이 녹자마자 온몸을 드러내 한바탕 난리를 떱니다. 싸늘한 은세계는 그렇게 순식간에 꽃과 새들이 어우러진 신세계로 바뀝니다. 한 번 두 번 겪은 일도 아니건만, 여전히 저는 위대한 자연의 변화 앞에서 가슴이 뜁니다. 당신은 어떠십니까?
당신이 사는 집 마당에도 눈이 내리고, 당신이 거니는 골목길에도 봄바람이 불고, 당신이 지나는 길가 가로수와 화단에도 꽃이 피겠지요. 당신은 어떠십니까? 당신도 어디선가 풍기는 꽃향기에 문득 걸음을 멈추고, 하얗고 빨간 꽃봉오리를 환희로운 눈길로 바라보고, 훈훈한 봄바람에 남몰래 미소를 지으십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한번쯤 되물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나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풍요로운 물질문명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생활환경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개선되었고,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노동시간 역시 기술의 발달로 많이 단축되었습니다. 이젠 옷 한 벌을 짓기 위해 기나긴 밤을 이어 길쌈하지 않아도 되고, 밥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 매운 연기 들이마시며 군불을 지피지 않아도 되고, 한 광주리 빨랫감을 지고 멀리 냇가까지 오가지 않아도 됩니다. 버튼 하나면 그 모든 것이 해결되는 편리한 세상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그리운 벗을 찾아 고단한 밤길을 걸을 필요도 없고, 아름다운 풍광을 찾아 열흘간의 양식과 짚신을 준비할 필요도 없습니다. 맘만 먹으면 언제든 그리운 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서울에서 부산도 하루에 다녀올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생존에 필수적인 요건들을 충족하기 위해 들여야 할 시간과 비용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즉 옛날 사람과 비교하자면 시간이 남아돌아야 정상입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현대인들이 과거 사람들보다 여유롭게 산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제 눈에는 현대인들이, 그것도 물질문명의 첨단을 갖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더 바쁘게 보입니다. 그들에겐 하루가 25시간이라 해도 부족합니다. 새벽이슬에 묻어나는 풀 향기를 맡을 시간도 없고, 하늘 높이 치솟은 구름기둥을 쳐다볼 시간도 없고, 어둠 속에서 몸을 뒤집는 낙엽 소리를 들을 시간도 없습니다. 사람이고 자동차고 새벽부터 한밤까지 쏜살같이 내달리기만 합니다.
잠시도 멈추지 못하고 저렇게 아찔한 속도로 달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더 넓은 집에서 살고, 더 비싼 차를 타고, 더 좋은 음식을 먹고, 더 멋진 취미를 즐기기 위해서라고. 그리고 그 모두를 성취하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하지만 그런 행복은 여름날 무지개처럼 끝내 손아귀에 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더 넓은 집, 더 비싼 차, 더 좋은 음식, 더 멋진 취미는 현실 속에 없습니다. 매우 아름답긴 하지만 그건 꿈이고 환상입니다. 잠에서 깨고 나면 꿈은 헛헛함만 남길 뿐입니다.
'더'라는 한 글자가 당신의 갈증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어제보다 넓은 집을 갖고, 어제보다 비싼 차를 타고, 어제보다 화려한 옷을 입고, 어제보다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면 어쩌면 당신은 매우 기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 좋은 것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시 후면 목마른 사슴처럼 아지랑이 물결을 향해 다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야 할 것입니다.
'더'라는 그 한 글자가 당신의 여유를 빼앗고 있습니다. '더'라는 한 글자에 사로잡혀 있는 한 당신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에 눈길을 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온통 마음이 '더 나은 것'에 쏠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이 얼마나 푸근하고 아기자기한지, 타고 다니는 차가 얼마나 편리하고 유용한지, 입고 있는 옷이 얼마나 따뜻하고 부드러운지, 먹고 있는 음식이 얼마나 정성스럽고 맛있는지,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고 사는지, 느끼지도 못하고 감사해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가난합니다. 너무나 많은 것을 누리고 있음에도 항상 얼굴을 찌푸리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삶에 여유가 없습니다. 구속하고 명령하는 자가 없는데도 우리는 저당 잡힌 인생처럼 스스로 쉬지를 못합니다.
삶에 그리 많은 물질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당신은 이미 넘칠 만큼 갖추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당신이 채워야 할 것은 통장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당신의 마음을 채울 아름다운 보석은 주변에 가득합니다. 그것을 돌아볼 여유가 당신에게 없을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에게 한번쯤 출가해보실 것을 권합니다. 소박한 음식과 볼품없는 옷과 비좁은 잠자리로도 충분히 행복한 산중의 삶은 분명 당신의 가슴에서 '더'라는 한 글자를 떼어내 줄 것입니다.
출가학교_ 퇴우정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