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과 불평등의 역사_ 장하성
1980년대 초 미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갑자기 소득 불평등이 악화되고 양극화가 심화되었던 것일까? 1980년 초는 미국 정부의 정책에 큰 변화가 있었던 시기다. 1981년에 들어선 공화당의 레이건 정부는 1940년대 이래 시장의 조정자 역할을 해 오던 정부의 역할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정부의 시장 개입을 축소하는 반면에 시장의 역할을 최대한 확대하여 시장 스스로 알아서 작동하도록 하는 시장 근본주의 또는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이 시작된 것이다. 레이건 정부 이후 12년을 집권한 공화당 정부가 줄기차게 추진한 규제 완화, 고소득 계층에 대한 감세, 정부 서비스의 민영화, 노조 무력화, 금융 자유화 등의 정책들이 미국의 소득 불평등을 약화시킨 직간접적인 원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불평등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만들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미국이 1940년대 이후 35년 동안 유지되어 오던 상대적으로 평등한 구조가 불평등한 구조로 바뀐 것은 미국 정부의 정책 실패에 기인한 것이다.
정책적 노력의 결과
그렇다면 미국은 1940년대 초반에 어떻게 불평등 구조를 교정하고 이를 35년 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 역시 미국 정부의 정책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미국에서 중산층이 생겨난 것은 자연 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정부의 의도된 정책의 결과로 짧은 기간 동안 만들어진 것이었다. 미국의 '중산층 사회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 정책의 일환인 (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전시 임금통제를 통해 몇 년이 채 안 되는 기간 안에 만들어졌다. 이 놀라운 사실을 처음으로 주장한 경제사학자인 클라우디아 골딘과 로버트 마고는 이를 대압축이라고 불렀다.' 소득 불평등이 짧은 기간에 급속도로 완화되었기에 이를 '대압축'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전쟁 기간 중에 정부의 임금통제권을 활용하여 고소득 계층의 임금 인상을 승인하지 않는 한편 저소득 계층의 최저 임금 인상 정책을 폈다. 또한 전시 물자 생산에 필요한 저숙련 노동자의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소득격차 축소에 한몫을 했다. 이와 같은 정책 덕분에 1940년 초부터 극단적 저임금과 극단적 고임금 모두가 줄어 소득분포가 완만해진 것과 더불어 일자리도 늘게 됨으로써 미국의 소득분배가 평등해진 것이다. 전시 중에 일자리를 찾았던 저숙련 노동자들은 숙련 노동자층으로 변신했고, 전후 미국 산업 경쟁력에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전후 '황금기'에 미국의 산업 발전에 비례하여 중산층이 만들어졌으며, 이때 형성된 '산업 발전 - 중산층 형성 - 평등한 소득분배'의 선순환 구조가 1970년대 후반까지 지속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미국의 분배 구조가 20세기 초의 불평등 구조에서 1940년대 초의 평등 구조로 바뀐 것이나, 다시 1980년대 초부터 불평등 구조로 회귀한 것은 모두 자연 발생적으로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정부 정책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경험에 비춰볼 때 지금의 불평등한 구조는 시장 경쟁으로부터 초래된 자본주의의 본질적 결함 때문만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시장의 힘은 불평등을 만들어낸 요인 중 하나일 뿐 유일한 요인이 아니며, 오히려 시장을 조정하고 실패를 보완하는 역할을 포기한 정부가 불평등을 악화시키는 데 기여한 것이다. 시장에서의 경쟁이란 더 많은 결과를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수단일 뿐이며, 평등한 결과를 보장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경쟁이 불평등한 분배의 결과를 만드는 것은 순위를 정하고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경쟁의 당연한 속성이다. 시장이 만들어낸 결과를 공평하고 평등하게 배분하는 기능은 경쟁의 불평등한 속성을 교정하기 위해서 만든 인위적인 제도에 의해서 가능하며, 이는 시장이 아니라 정부가 해내야 할 역할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경험은 '제대로 된 좋은 정책'을 시행한다면 지금의 불평등한 구조를 다시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제 발등 찍은 유권자들
미국에서 소득 불평등과 평등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비록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근본적인 모순은 극복할 수 없을지라도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진 정책 수단을 통하여 불평등의 문제를 상당한 정도로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정부의 정책으로 보다 나은 자본주의를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미국은 지금과 같은 불평등한 구조로 치닫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미국의 정치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은 상대적으로 부유층과 재계의 지지를 더 많이 받는 보수 우파 공화당과 중산층, 노동자, 빈곤층의 지지를 더 많이 받는 진보 좌파 민주당의 양당 정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미국의 불평등 구조는 진보 좌파인 민주당이 집권했을 때보다 보수 우파인 공화당이 집권했던 시기에 훨씬 더 악화되었고, 심지어 미국의 진보적인 학자들은 지금의 불평등 구조란 공화당이 적극적으로 만든 것이라고까지 주장한다.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 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먼은 "1970년대 뉴딜의 성과를 무산시키려는 급진적인 우익 세력이 공화당을 장악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보수파가 되어 오랫동안 인정받아 온 제도적 평등의 수호자 역할을 했던 민주당과 충돌을 빚었다. 강력해진 골수 우파 세력은 노조 운동에 대해 무차별 공격을 감행하며 노동자들의 단체교섭 능력을 크게 약화시켰고, 그대로 두면 한없이 치솟을 경영진의 연봉에 제한을 가하던 정치적, 사회적 제약을 없앴으며, 부자들의 세금을 대폭 줄였고, 그 밖에 여러 방법으로 불평등의 확대를 초래했다." 고 지적한다.
그리고 또 다른 진보 경제학자인 조셉 스티글리츠는 "기업가들이 시장의 투명성을 떨어뜨려서 경쟁을 불완정하게 만들고 자신들은 더 많은 수익을 챙겼으며 금융 기업들이 "정치적 힘을 이용하여 정부가 시장 실패를 바로잡지 못하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했고, 금융 부문에 소속된 개인은 여전히 자신의 사회적 기여를 넘어서는 후한 보수를 획득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글로벌 금융 위기가 발생한 이후에도 금융 위기의 한 원인이 된 "파생 상품 거래의 투명성을 제고하고 반경쟁적 관행을 제한하는 규제책을 마련하라는 요구에 저항했다." 고 주장한다. 이러한 지적들에 대해서 1980년대 초부터 시장 근본주의 또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주장했던 보수 우파 학자들은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에는 주목받을 만한 의미 있는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공화당은 레이건 대통령이 집권한 1981년부터 금융 위기가 발생한 2008년까지 28년이란 기간 중 20년을 집권했다. 특히 1981~1993년의 12년 동안 세 번 연속 집권한 시기에 소득 불평등이 크게 악화되었다. 공화당 집권 기간 동안 불평등이 더 심해졌는데도 불구하고 공화당이 장기 집권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간단하게 요약한다면 미국의 백인 노동자들이 보수화되었다는 견해, 유권자들이 경제적 이슈보다는 '도덕적 가치'를 정당 선택에서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견해, 낙태와 같은 종교적인 이슈가 경제적 이슈보다 더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견해등이 있다.
그러나 미국의 진보적인 학자들의 견해는 미국의 정치, 보다 광범위하게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는 의견들이 많다. 특히 중산층과 근로 빈곤층이 '근시안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하는 투표를 했기 때문에 스스로 손해를 자초했고, 경제적 불평등을 더 악화시키는 선택을 했다고 분석했다. 또한 부유층들이 선호하는 내용들은 경제문제와 같이 실제 정책에 반영이 되지만, 낙태나 도덕적 가치, 애국주의 등 중산층과 저소득 계층이 선호하는 내용들은 실제 정책과 연관성을 갖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부유층은 정치인들에 대해 상당한 영향력이 있지만 빈곤층은 영향력을 갖지 못해서 경제적 계층에 따른 정치적 영향력의 차이가 존재하는 미국의 정치 구조가 불평등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지금과 같은 불평등한 자본주의가 된 것은 사람들의 탐욕 때문이라는 주장들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갖고자 하는 욕심이 있다. 그리고 삶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그리고 자신이 노력한 것에 대한 정당한 대가 이상으로 훨씬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탐욕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소득 불평등이 심해진 지난 30년 동안 미국 사람들의 본성이 과거보다 더 탐욕적이 되었다고 할 근거는 없다. 과거보다 더 탐욕적으로 물질적인 이득을 추구했다면, 다만 탐욕을 추구하는 것을 더 용이하게 만드는 기회가 많아졌기 대문이다. 파생 상품이나 통신과 같이 탐욕을 추구하는 기술적 수단이 발전했거나 또는 규제 완화와 같은 탐욕을 제어하는 제도적 장치들이 후퇴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정당한 평가일 것이다.
부당하게 탐욕을 추구할 기회가 많아지고 탐욕적으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기술적 발전이 있었는데도, 이를 규제하거나 제어하지 않고 시장에 방치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탐욕적인 행위를 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월스트리트의 금융가들이 전문가도 이해하기 어려운 파생 상품들을 만들어 일반 투자자에게 팔았는데도 미국 정부는 이를 방치했던 것이다. 미국이 불평등한 나라로 추락한 것은 미국 국민들의 심성이 옛날보다 더 탐욕스러워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잘못된 정치적 선택을 한 결과인 것이다.
민주주의가 희망이다
최장집은 한국은 절차적 민주주의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 자리 잡았고, 이제는 민주주의가 '시장 경쟁과 그것이 창출하는 불평등화와 소외 효과를 중화하고 보완하는 민중적 성격을 띠는 정치제도이자 체제'로서 작동하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할 때라고 한다. 실질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함께 잘사는 '정의로운 자본주의'를 목표로 삼는 정당이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정당이 국민의 지지를 받아서 앞서 논의한 정책들을 현실에서 실천해야 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최근의 한국의 정당들과 선거에서 나타난 한국의 정치 현실은 정치가 문제를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문제'이다. 그러나 희망을 버릴 수는 없다. 미국과 유럽의 자본주의 정치사에서 분배, 복지와 관련된 제도들을 도입한 것은 '과격한 좌파들이 아니라 비스마르크, 처칠, 루스벨트와 같은 계몽된 귀족 계층의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를 구하기 위해서 중산층을 보호하는 사회복지 정책을 채택했던 것이다. 새로운 대안 정당의 출현이 가능하지 않아도 기존의 정당들이 기득권을 깨고 진보와 보수를 넘어선 정치 개혁을 해서 함께 잘사는 '정의로운 자본주의'를 현실로 만들도록 국민들이 투표를 통해 요구해야 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경쟁이 가장 핵심적인 작동 원리다. 그러나 시장은 공정한 경쟁을 스스로 만들어내지 않는다. 공정한 경쟁이라 할지라도 시장은 공정한 분배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승자가 더 많은 몫을 가져가는 경쟁의 원리로 존재하는 시장은 설령 출발선에서 모두가 같은 역량과 자본을 가진 평등한 상태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결국은 스스로 '공정'을 '불공정'으로 바꿔놓고, '평등'을 '불평등'으로 바꿔놓는다. 시장은 더 큰 파이를 더 효율적으로 만들어내는 체제일 뿐이다. 노동자들에게 얼마만큼을 분배할 것이냐, 임금격차를 얼마로 할 것이냐, 비정규직을 어떻게 정규직으로 바꿀 것이냐는 민주주의가 결정할 문제이지 시장에 맡길 문제가 아니다.
누진세를 얼마로 결정할 것이냐, 지역 간 격차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기초 복지를 어느 정도 확대할 것인가, 어떤 부분에서 보편적 복지를 시행할 것이냐, 교육과 의료의 공공성을 어떻게 확대할 것이냐 등도 시장이 아닌 민주주의가 결정할 일이다. 시장은 가치중립적인 제도일 뿐이다. 시장에 사회적 가치나 이념적 경사를 부여하는 것은 시장을 운영하는 국민들이다. 시장이 공정한 질서를 유지하고, 시장에서 만들어진 결과를 공정하게 함께 나누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시장이 아니라 국민들이다. 함께 잘사는 '정의로운 자본주의'를 만들어내는 것은 시장이 아니라 시장을 운영하는 정부와 정치, 그리고 민주주의가 해내야 할 몫인 것이다.
자본주의 역사는 노동과 자본의 끊임없는 협력과 충돌의 역사다. 생산을 위해서 노동과 자본이 결합하고 협력해야 한다. 그러나 생산으로 만들어낸 부가가치를 나누는 단계에서는 노동과 자본은 서로 많은 몫을 가져가려는 이해관계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자본이란 돈이 돈을 버는 세포분열적인 자기 복제성이 있다. 하지만 노동은 복제가 불가능하며 유일한 확장 수단이 생산성, 즉 역량을 늘리는 것이다. 자본은 이동성이 높지만 노동은 그렇지 못하다. 자본은 언제든지 더 나은 투자를 찾아서 국경을 넘어서 순간적으로 이동하지만, 노동은 일단 한 번 자리를 잡으면 대안적 일자리를 찾기 어렵다. 이러한 노동과 자본의 본질적인 속성의 차이로 인해서 노동과 자본의 이해가 충돌될 때는 노동이 자본보다 항시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작동해야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이론 정치학자인 로버트 달은 '어떤 법체계도 재산권을 자연권으로 주장하는 것을 완전히 인정한 적이 없다.' 그리고 '재산권은 단일한 권리가 아니다. 그것은 권리와 특권, 의무와 책임의 묶음'이라고 했다. 소득 불평등과 양극화를 해소하고 함께 잘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자본의 사회에 대한 의무와 책임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민주적 절차를 통해 민주주의, 공정성, 효율성 등의 가치를 추구하고, 바람직한 인간성을 함양하고,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수적인 최소한의 개인적 자원을 확보할 수 있도록 정의로운 분배를 달성할 방법을 모색하고 결정할 권리를 갖는 것이 민주주의인 것이다.
한국에 함께 잘사는 '정의로운 자본주의'가 현실이 될 희망은 민주주의에 달려 있다. 자본과 노동의 이해가 충돌할 때, 불평등을 만드는 자본주의는 자본의 편이다. 그러나 평등을 만드는 민주주의는 노동의 편이다. 자본주의는 기득권 세력, 부유층 그리고 재벌의 편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중산층과 서민, 소외층 그리고 중소기업의 편이다. 자본주의는 '돈'이라는 무기가 있지만, 민주주의는 '1인1표의 투표'라는 무기가 있다. 국민의 절대다수는 자본이 아닌 노동으로 삶을 영위한다. 그러기에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와 충돌할 때, 민주주의가 가진 '투표'의 무기가 작동되면 자본주의의 '돈'이라는 무기를 이길 수 있거나 적어도 제어할 수 있다.
승자가 더 많은 몫을 가지려는 경쟁의 원리는 경쟁을 스스로 소멸시키는 모순을 가지고 있고, 또한 개별 경쟁자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 경제 전체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 구성의 모순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그러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없는 자본준의는 스스로 소멸한다. '투표'가 '돈'을 이겨서 함께 잘사는 '정의로운 자본주의'를 만들어내는 것은 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이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살리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한국은 함께 잘사는 '정의로운 자본주의'를 실현할 한국의 현실에 맞는 정책들을 만들어낼 역량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자본이 아닌 노동으로 삶을 꾸려가는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계급 투표'와 '기억 투표'를 한다면 함께 잘사는 정의로운 자본주의가 현실이 되는 실질적인 민주주의가 이뤄질 희망은 있다.
한국 자본주의_ 장하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