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정책

명품 백보다 싼 '사람 값'_ 김연희

정정진 2016. 5. 24. 10:15


최저임금으로 한 달 살기


체험 9일차


점장 얼굴이 심란했다. 직원 수찬(가명 28)은 연거푸 마른세수를 했다. "이게 얼마짜리인지나 알아요?" 손님은 카운터에서 점장을 몰아붙였다. 수찬이 테이블에서 조리를 하는 도중 손님 가방에 양념이 튄 것이었다. 눈곱만큼 작은 점이었지만, 가방이 200만 원짜리 명품이었다. 점장이 명동의 명품 전용 세탁소까지 따라간 뒤에야 손님은 화를 가라앉혔다. 세탁비 30만 원을 부담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옛날 같으면 30만 원 내고 말지 생각했을 것이다. 이제는 사정이 다르다. 30만 원이면 내 일주일치 임금보다 많다. 50시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다. 30만 원을 배상해주면 한 달치 고시원 월세가 사라지는 것이다.


오후 3시 30분, 가게 움직임이 한결 둔해졌다. 점장은 "퇴근하고 싶은 사람"을 외쳤다. 다들 점장의 시선을 피했다. 다시 점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간 옷, 다 모여. 가위바위보 해." 난 아예 주방으로 숨어버렸다. 이곳은 사장의 의중에 따라 노동시간이 조정되었다. '노동유연성'이 100퍼센트 관철되었다. 의문이 들었다. 점장이 전화를 하지 않는데도 사장은 어떻게 꺾기를 해야 할지 알까? 정답은 머리 위에 있었다. 매장에는 지하까지 CCTV 4대가 설치되어 있다. 사각지대가 없다. "사장이 스마트폰으로 CCTV를 보면서 꺾기를 지시한다."고 현아가 귀띔했다.


체험 10일차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꺾기


아침 메뉴를 치즈빵에서 김밥으로 바꿨다. 매일 2600원씩 나가는 치즈빵, 커피 값이 부담스러웠다. 그렇다고 시리얼이나 달걀 프라이 같은 간단한 음식으로는 퇴근까지 7~8시간을 버티기 어려웠다. 1500원짜리 김밥이 영양, 열량, 가격 모든 면에서 제격이었다. 매일 500밀리리터 생수병에 고시원 정수기 물을 받아 들고 나갔다. 버스에 타 라디오를 들으면서 김밥을 먹었다.


출근해야 할 동익이 나오지 않았다. 교통사고를 당했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검사를 하느라 당분간 가게에 나올 수 없다고 했다. 만약 교통사고가 나서 일을 못 하게 되면 나처럼 1인 가구 최저임금 노동자는 당장 큰 일이다.


우산 장수와 비옷 장수를 뺀 모든 자영업자는 비 오는 날을 싫어할 것이다. 알바생의 심경은 좀 더 복잡하다. 이곳 음식점처럼 호떡집에 불난 듯 바쁜 영업장은 비가 오면 손님이 꽤 줄어드니 일하기가 한결 수월해진다. 반면 손님이 줄면 '꺾기'를 당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불안하다 싶었는데 역시나 꺾기를 당했다. 평소에는 오후 5시까지 일했는데 오늘은 4시 30분에 퇴근했다. 우중 조기 퇴근, 예정보다 9000원이나 적게 벌었다. 옷 갈아입고 나오니 점장은 사장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 사장이 알바생 대부분을 일찍 퇴근시키라고 했다.


역시나 비가 와서 매출이 썩 좋지 못했나 보다. 가게가 한가하다는 표현은 절대 파리 날린다는 뜻이 아니다. 오후 4시 가장 손님이 적은 시간에도 30개 테이블 중 10여 개가 차 있었다. 알바가 꺾기를 당하면 그 불똥은 직원에게 튀었다. 줄어든 인원만큼 직원이 두세 배 일을 해야 했다.


일찍 퇴근한 까닭에 오후 6시 고시원에 돌아왔다. 스스로 정한 4계명 가운데 하나인 '운동하자'를 아직 지키지 못했다. 헬스클럽이라도 등록해볼까 싶어 주민센터를 찾았다. 그때야 오늘이 재,보궐 선거 날이라는 것을 알았다. 주민등록지 이전을 하지 않아 내겐 투표권이 없다. 하지만 투표권이 있다 해도 모르고 지나치기 쉬웠을 것 같다. 일이 끝나고 돌아오면 지쳐서 잠들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세제를 사러 동네 슈퍼마켓에 갔다. 제일 싼 것이 7000원이었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내가 지금 슈퍼마켓에서 무얼 사고 있는가. 다이소가 있는데.' 다이소에서는 2000원짜리 세제를 팔았다. 물론 용량은 슈퍼 제품보다 적었다. 1인 생활자에게 필요한 세제 양으로는 충분했다. 세제 브랜드는 짝퉁이었다. 잘 빨릴까 의심스러웠다. 역시 빨래 후에도 흰색 양말 발바닥이 여전히 새까맸다. 그렇다고 세제를 새로 살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다음번에는 세제 양을 늘려볼 작정이다.


손톱이 길면 일할 때 음식물 찌꺼기가 자꾸 끼어서 손톱깎이를 샀다. 손톱깎이로 일주일 만에 베개에 달려 있던 가격표를 잘라냈다. 점심 대용으로 이번에는 초코빵보다 더 작은 파이를 샀다. 가게에는 여자 화장실이 한 칸밖에 없다. 화장실에서 초코빵을 먹다가 다음 사람이 오면 2개를 다 먹고 나갈 여유가 없었다. 파이는 작아서 꼭 화장실에 가지 않아도 일하는 동안 몰래 한입에 넣을 수가 있었다.


체험 14일차


냄새로부터 도망치고 싶다


공중목욕탕을 싫어한다. 후덥지근하고 고온 다습한 날씨를 참지 못하는데 굳이 뜨겁고 습한 공간을 찾을 이유가 없었다. 스무 살 이후 공중목욕탕에 간 건 한 번뿐이었다. 엄마와 여행을 가서였다. 엄마는 목욕탕에 가서 씻지 않는 나를 더럽다고 타박했지만, 나는 매일 샤워도 하고 집에 있는 욕조에서 반신욕도 한다. 굳이 공중목욕탕에 갈 이유가 없었다.


고시원에서 살고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고시원 방은 퀴퀴한 냄새가 났다. 냄새로부터 도망갈 구석이 없었다. 냄새 속에서 샤워를 하니 개운치가 않았다. 일하는 음식점에서 밴 냄새도 샤워만으로는 가시지 않는 느낌이었다.


결국 내 발로 공중목욕탕을 찾았다. 이용료는 6000원. 최저임금으로 한 달 살기 체험을 시작하고 나서 가격 대비 만족도가 가장 높았던 선택이었다. 한 주 동안 쌓인 피로가 뜨거운 물에 녹는 기분이었다. 그간 목욕탕에 가기 싫었던 건 고생을 덜해서였을까? 간 김에 체중도 쟀다. 어, 고장 났나. 두서너 번 오르락내리락했다. 2킬로그램이 빠졌다. 이 경우 대부분은 '지화자'를 외치겠지만 불행하게도 내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한 선배는 식당에서 일하는 내 모습을 보고 난민 같다고 했었다. 그런데 난민 상태에서도 살이 더 빠진 것이다.


오후에는 친구와 KBO리그 넥센 대 LG 의 경기를 보러 잠실구장으로 향했다. 나는 넥센 히어로즈 팬이다. 그럼에도 목동 대신 잠실을 찾은 건 입장료가 더 쌌기 때문이다. 목동구장에는 외야석이 없어서 저렴한 티켓이 없다.


최저임금 노동자는 넥센 팬 노릇을 하기도 힘들다. 친구는 내 자금 사정을 고려해 외야석에 앉자고 했지만 그냥 내야석을 '질러버렸다' 1만 4000원. 목동구장이었다면 2만 원짜리 좌석이다. 치킨과 맥주, 응원 풍선까지 합쳐서 총 3만 원을 지출했다. 출발할 때 들고 나간 '신사임당 언니'가 사라졌다. 적지 않은 비용이라는 것을 안다. 외야석에 앉았다면 6000원을 절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왕 온 김에 응원석에 앉아서 제대로 즐기고 싶었다. 앞으로 한동안은 네이버 중계로만 야구를 즐겨야 할 테니.


이런 시급 6030원_ 청년유니온, 한국비정규직노동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