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성찰

왜 분노해야 하는가_ 장하성

정정진 2016. 5. 11. 09:38



누가 바꿀 수 있는가?


지금의 불평등한 한국을 보다 평등한 사회로 바꿀 수 있는 방안들은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누가 이를 현실에서 실천할 것인가 하는 '주체'에 달렸다. 그것이 필자가 이 책을 통해서 답을 구하고자 하는 마지막 질문이다. 누가 세상을 바꿀 것인가를 논의하려면, 먼저 누가 지금과 같은 세상을 만들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세상은 스스로 진화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를 주도하는 세력과 사회의 구성원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청년세대들이 희망을 포기할 정도로 불평등한 한국을 만든 것이며, 오랜 세월 동안 세상이 그렇게 되도록 방치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한국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수많은 '자랑스런' 재벌 대기업을 가지고 있고, 그들이 한국 경제의 성장을 이끌어가고 있다. 동시에 그들은 한국 사회의 불평등을 만든 원인 제공자이기도 하다. 불평등의 원인이 고용 불평등과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불균형으로 만들어진 임금 불평등이고, 고용 불평등과 기업 간 불균형을 주도한 주체는 한국 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재벌 대기업이라고 필자는 진단했다. 재벌은 한국 경제의 거의 모든 영역을 장악하고 있다. 재벌이 하지 않은 사업을 찾기가 힘들다. 경제만이 아니라 언론, 교육, 문화분야까지도 직접 장악하고 있고, 재벌들의 영향력이 직접적으로 미치는 정치인, 관료, 법조인, 학자들도 적지 않다. 재벌은 경제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권력을 넘어서는 한국 사회 전반에 지배력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한 그들의 힘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를 만들었고,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차별을 만든 것이다.


다시 반복하지만 일자리의 4%밖에 만들지 않는 재벌 100대 기업이 이익은 60%를 차지하는 극심하게 기울어진 기업 생태계는 시장이 아니라 재벌 대기업이 만든 것이다. 경제성장의 성과 중에서 국민에게 분배하는 몫을 줄이고 그들이 가져가는 몫을 늘렸기 때문에 불평등이 심해진 것이다. 만약 불평등을 만든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재벌 대기업이 나서서 스스로 비정규직을 없애고, 고용격차를 완화하고, 중소기업에 대한 분배를 늘리고, 저임금노동자에 대한 분배를 늘린다면 한국의 불평등은 순식간에 해결된다. 재벌들이 정말 그런 일을 실천한다면 한국은 함께 잘사는 정의로운 성장을 이루는 또 하나의 기적을 만들게 된다. 그러나 그런 기적은 없을 것이며, 이를 기대하는 것은 몽상일 뿐이다.


부모는 자식이 자신보다 더 잘되기를 바라고, 자식을 위해서 많은 것을 희생한다. 지금의 부모 세대가 그렇고, 그들의 부모 세대도 그랬으며, 그렇기 때문에 말 그대로 죽어라고 일했다. 그러한 부모들의 노력과 희생이 한국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었고, 자식 세대가 부모 세대보다 더 나아진 것이 한국이 발전한 과정이었다. 지금의 기성세대는 그들의 부모 세대보다 더 잘되었고, 자식 세대들에게 자신들이 누리지 못한 풍요를 제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세대를 물린 선순환 구조가 깨져버리고 말았다. 지금의 청년세대인 자식 세대는 기성세대보다 잘되지 않았다. 비록 부모보다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청년세대에게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고, 그래서 그들은 부모 세대와 같은 꿈을 꾸지 않는다. 청년세대는 젊음의 특권인 연애, 결혼, 출산마저도 포기하는 3포 세대가 되었고, 스스로를 쓸모없는 나머지라고 자조하는 잉여 세대가 되었다. 꿈이 없다는 것은 절망의 끝에 서 있는 것이다. 한 개인이 아니라 한 세대가 꿈을 포기했다면 그 사회는 미래가 없는 죽은 사회다.


한국의 모든 부모가 자식을 자신보다 더 잘되게 하려고 온갖 노력과 희생을 했는데도, 자식 세대가 꿈을 꾸지 않은 절망에 이르렀다는 것은 한국 사회의 모순이고 비극이다. 한국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가? 불평등을 만든 직접적인 책임은 재벌 대기업에 있다. 재벌 대기업이 불평등한 나라를 만들도록 방치한 책임은 청년세대의 부모인 기성세대에게 있다. 기성세대는 한국을 빈곤에서 탈출시키고 오늘의 풍요를 일구어낸 산업화 세대로서 그리고 군사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쟁취한 민주화 세대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 왔다. 그러나 그들은 경제가 성장해도 국민이 더 잘살게 되지 않고 자식 세대의 희망을 빼앗아버린 나라를 만든 책임도 함께 있는 것이다.


왜 20여 년 가까운 긴 세월 동안 기성세대가 세상을 이렇게 만들어 왔는가를 이 책의 뒷부분에서 논의하고 있다. 여기서는 다만 기성세대와 청년세대가 동일한 시대에 같은 한국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의심할 정도로 한국의 현실에 대한 인식이 서로 간에 어긋나 있다는 점만 지적하고자 한다. 세대 간 현실에 대한 극단적인 인식의 차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여론조사 결과를 예로 들어보자.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산업화 세대인 60대 이상은 열 명 중 여덟 명, 민주화 세대인 50대는 열 명 중 다섯 명이 '잘하고 있다'고 답을 했다. 그러나 잉여 세대인 20대는 열 명 중 여덟 명, 3포 세대인 30대는 열 명 중 일곱 명이 '잘못하고 있다'고 답을 했다.


정치적 지지나 호감을 물어본 것이 아니다. 지금 한국을 잘 이끌어가고 있는가를 물어본 것이다. 자식 세대는 절대다수가 '잘못하고 있다'라고 하는데, 부모 세대는 정반대로 절대다수가 '잘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같은 시대 같은 대통령을 두고 부모와 자식은 서로 다른 대통령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한국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리더십에 자식은 희망을 포기할 정도로 '문제가 많다'고 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부모는 '문제가 없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주관적인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객관적인 현실에 대한 기성세대의 인식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하고, 저임금노동자가 가장 많고, 고용이 가장 불안정하고, 무엇보다도 청년세대가 비정규직과 실업으로 아파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기성세대가 아무리 보수적이라 하더라도 이를 좋다고 생각할 리는 만무할 터, 이것은 그들이 현실을 모르거나 아니면 외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는 온갖 희생을 감내해 왔는데도 자식이 꿈을 꾸지 못하는 절망에 이르러서 스스로 3포와 잉여라고 자조하고 있는 한국의 모순은 기성세대가 만든 것이다. 개인으로서 부모가 아니라 집단으로서 부모가 세대가 만들었다는 말이다. 기성세대는 자신이 청년일 때 한국 사회의 중심에 서서 세상을 바꾸는 주역을 했다. 60대 이상인 산업화 세대는 그들이 30대와 40대일 때부터 경제와 정치의 중심에 서서 한국을 빈곤으로부터 탈출시키고, 유신독재에 저항하면서 세상을 바꾸었다. 50대에 들어선 민주화 세대도 그들이 30대일 때부터 세상의 중심에 섰다. 그들은 청년 시절에 민주화를 완성시키고 곧바로 정치계, 재계, 학계, 노동계의 중심에 진입해서 세상을 바꾸는 주역으로 등장했기에 '386' 세대라고 불렸다. 그런데 그들의 자식들인 30대와 20대는 무슨 세대인가? 지금의 청년세대에게는 부모 세대와 같은 시대정신이나 세대정신이란 한갓 사치일 뿐이다. 그들은 3포 세대와 잉여 세대라는 절망의 단어로 불리고 있을 뿐이다.


기성세대는 자신이 청년일 때부터 지금까지 지난 20년 이상을 사회의 중심에서 한국을 이끌어 왔다. 그 결과로 이제 한국은 불평등한 나라, 청년세대에게서 희망을 빼앗아가는 나라가 되었다. 청년세대는 기성세대가 만들어준 세상의 틀에 자신을 맞추어가면서 아파하고 희망을 포기하고 있다. 미래는 기성세대의 것이 아니다. 청년세대의 것이다. 그런데도 기성세대는 청년세대에게 오히려 그들을 경쟁으로 몰아넣고 비정규직, 저임금 그리고 실업의 굴레를 씌워주고 있다. 기성세대는 아직도 한국의 중심에 서서 자신이 만들어낸 '과거'의 한국에 계속 갇혀 있다. 그들은 청년세대를 위해서 세상을 바꿀 생각이 없고, 자식 세대에게 세상의 중심에 설 기회를 줄 생각도 없다.


재벌 대기업에게 함께 잘사는 보다 평등한 한국으로 만드는 기적을 바랄 수도 없고, 기성세대에게 세상을 바꿀 것도 기대할 수 없다면 누가 한국을 바꿀 것인가? 바로 미래의 주인이 바꿔야 한다. 20대와 30대로 정의한 청년세대 또는 젊은 세대만이 지금의 한국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이 답이 이 책을 쓴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청년들이 아프다고 한다. 기성세대가 강요한 틀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서 온갖 스펙을 쌓고, 자기계발을 하고, 원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아무리 힘들어도 긍정의 힘으로 이겨내고, 그래도 힘들면 스스로 힐링하면서도 아파한다. 그들의 아픔은 높은 이상을 이루지 못해서도 아니고, 세상을 걱정해서도 아니고, 부모 세대처럼 자유와 민주를 쟁취하려는 투쟁 때문도 아니다. 청년세대의 아픔은 '월급 많이 주는 정규직' 일자리를 갖지 못해서이고, 저임금 비정규직을 벗어나지 못해서 오는 불평등의 아픔이다.


청년세대의 꿈이 단지 '취업'으로 쪼그라든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들의 공포는 세상이 그들에게 강요한 것이다. 기성세대가 만들었고, 바꿀 생각도 없는 불평등한 현실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세대의 아픔은 결코 스펙 쌓기와 자기계발, 긍정과 힐링으로 치유될 수 없다. 내가 치유된다 하더라도 누군가는 나의 아픔을 대신 감내해야 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아픔은 세상을 바꾸지 않고서는 치유될 수 없다. 청년세대가 스스로 이를 깨닫고 자신만이 아니라 세상을 힐링하는 데 나서야 한다. 혼자서 긍정의 최면을 걸고 자기계발의 노력을 하면 극복된다는 미신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초대기업에서 정규직 일자리를 갖는 사람은 열 명 중 한 명도 채 되지 않는다. 아무리 긍정하고 힐링해도 나머지는 모두 여전히 잉여와 3포로 남아야 한다. 그러기에 자신이 아닌 세상을 힐링하고 바꿔야 한다.


지금의 정의롭지 못한 한국을 기성세대가 만들었는데 청년세대에게 세상을 바꾸는 짐을 떠넘기는 것은 기성세대가 무책임한 것이다. 더구나 청년세대는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틀에 맞추어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세상을 바꾸라고 하니 억울하다고 항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도 기성세대이기에 책임이 있다. 그러기에 청년세대에게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말해주어도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멘토질 같은 잔소리를 하려고 한다.


첫째, 청년세대는 기성세대가 강요하는 방식이 아닌 자신 세대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 기성세대와 청년세대는 같은 시대 같은 나라에 살고 있지만 서로 다른 세상을 보고 있다. 미래는 청년세대의 것이지 기성세대의 것이 아니다. 청년세대가 바라는 세상을 자신의 방식으로 만들어야 한다. 기성세대도 그들이 청년세대일 때부터 자신의 이상을 좇아서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었다.


둘째, 청년세대에게 강요된 틀에 무조건 순응하지 말고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한국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지금의 현실을 제대로 본다면, 그리고 그 모순된 현실이 노력 부족과 같은 자기 책임이 아니라면, 그리고 거기에서 빠져나올 방법도 없다면 분노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제대로 알고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절망할 필요도, 아플 이유도, 힐링할 필요도 없이 그저 맹목적으로 긍정하고 자기계발에 열중하면 된다. 청년세대의 분노는 정의롭지 않은 한국의 현실을 바꾸는 시작점이자 가장 중요한 점이다. 모든 행동은 인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셋째, 지금의 청년세대가 겪고 있는 아픔을 적어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는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청년세대는 부모 세대보다 못한 세대가 되었고, 그것은 기성세대의 탓이다. 청년세대 역시 기성세대가 저지른 잘못을 반복한다면, 그래서 이를 다시 다음 세대에게 물려준다면 한국은 미래가 없다. 10년 전 '88만 원 세대'였던 30대는 '3포 세대'로 추락했고, 다시 '5포 세대'로 진화하고 있다. 20대는 쓸모없는 나머지라는 '잉여 세대'라고 자조하고, 너무도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n포 세대'가 되어가고 있다. 청년세대가 이런 퇴보와 퇴행과 비정상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하지만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다. 청년세대는 부모처럼 자식만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는데 그치지 말고 자식의 친구들 모두에게, 자식 세대에게 보다 평등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물려주어야 한다.


정의롭지 못한 분배로 만들어진 불평등으로 인해서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고통 받고, 성장의 혜택을 누리는 1%의 소수와 소외된 99%의 다수로 갈려서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세상은 저절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인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지금의 불평등한 한국의 현실도 힘을 가진 기득권 세력들과 그들의 조력자들의 의도로 설계되고 실행된 결과이지 시장에서 스스로 진화한 결과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현실에 순응하고,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이 기적에서 나락으로 추락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다수의 국민들이 함께 나선다면 지금의 한국을 바꿀 수 있다. 청년세대만이 아니라 기성세대도 정의롭지 못한 현실에 함께 분노해야 한다. 불평등한 불의를 보고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음까지 노예가 되는 것이다. 불평등으로 고통 받고 있는 다수의 국민들이 함께 분노하고, 기성세대가 세상을 바꾸려는 청년세대에게 응원을 보낸다면 한국은 정의로운 사회라는 또 한 번의 새로운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다.


왜 분노해야 하는가_ 장하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