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종교

부처님의 탄생게와 한생명사상_ 도법스님

정정진 2009. 3. 27. 00:04
<<< 다보법회 지상설법 / 도법 스님 >>>

※ 디지털 시대에 꿈꾸는 아날로그의 삶
정리·편집부
* 이 글은 2000년 3월 22일 대한불교진흥원 법당에서 봉행된 다보법회에서 도법 스님(실상사 주지)께서 법문한 내용을 <격월간 불교와문화>에 게재하고자 편집실에서 녹취, 정리했으나 지면 부족으로 싣지 못했던 원고입니다.

* 모든 문제의 원인은 무지와 오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것들을 좀 면밀하게 살펴보면 문제가 발생하는 1차적인 원인들이 무지(無知)와 오해(誤解)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한 예를 들어 본다면 우리가 매일 겪게 되는 인간관계에서 화를 내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상대방에게 화가 나서 한바탕 싸움을 하고 집에 돌아와 싸웠던 일들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서 싸웠던 이유를 되짚어 정리해서 보면 내가 꼭 싸워야 될 이유는 무엇이었나, 과연 화를 내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될만큼 중요한 어떤 일이 있어서 싸웠는가 하고 봤을 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어떤 사실에 대한 그릇된 편견과 혹은 잘못 알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덜컥 화부터 내게 되고 자기 성질을 못이겨서 싸움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리고 싸우고 난 다음에 곰곰이 되짚어 보면서 후회하게 되고, 사람들 대부분이 이런 경우를 많이 경험하게 되죠.

한가지를 보면 열 가지를 안다는 얘기가 있듯이 인생살이의 문제도 꼭 문제가 될 만한 일이 현실적으로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경우보다는 이 세상에 대해서 또는 우리 삶에 대해서 혹은 어떤 사안에 대해서 몰랐거나(무지) 또는 잘못 알았기 때문에(오해) 문제가 되는 경우가 거의 백퍼센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경전에서는 조금 전에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외웠습니다만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달리 표현하면 무지와 오해란 뜻입니다.

즉 무지와 오해에 근거한 사고와 삶의 태도로 삶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우리가 애써 노력은 하는데 그 노력한 결과들은 또다른 모순과 혼란, 또다른 문제를 재생산 해내고 되풀이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얘기죠. 『반야심경』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되고 있는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모든 문제의 원인은 무지와 오해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 무지와 오해의 근본을 풀어내야 한다는 것이죠.

무지를 깨우치고 오해를 바로잡지 않고서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노력한 것이 또다른 문제를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우리의 노력이 헛수고일 수밖에 없고, 그런 헛수고의 삶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 중생살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반야심경』의 내용입니다. 그 의미를 『반야심경』 첫구절에서는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즉 오온이 텅 비어있음을 꿰뚫어 보면 일체 고난과 액난이 소멸되어진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앞서 말씀드린대로 전도몽상, 즉 전도된 생각들을 다 떨쳐내면 그것이 곧 구경열반(究竟涅槃)이요, 모든 고난과 액난으로부터 해탈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 내용을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 바꾸어보면 무지와 오해를 깨우치고 바로 잡음으로써 우리가 희망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 무지와 오해에 대한 불교적인 접근

그렇다면 우리가 무지와 오해를 삶의 문제를 일으키는 일차적인 원인이라고 전제했을 때 이 무지와 오해를 불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무지를 깨우치고 오해를 풀어내기 위해서 불교를 알려고 하는 것이고, 불교를 통해서 무지와 오해를 해결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공부하는 것이 무지와 오해를 해결하는 제대로 된 불교공부일까요?

제대로 된 불교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르고 바람직한가, 이렇게 논리를 좁혀서 보면 거기에 대해서 사람마다 문제의식과 관점이 다를 수 있습니다만 제가 갖고 있는 관점으로서는 부처님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모르고서는 불교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제 관점이고, 불교를 모르고서는 우리가 불교를 제대로 신앙할 수 없고, 불교를 제대로 신앙할 수 없기에 결국 인생문제를 바람직하게 해결할 수도 없고, 우리가 꿈꾸고 있는 이상이나 가치를 실현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된다는 것이 제가 갖고 있는 생각입니다.

특히 한국불교는 1천6백년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고 우리 스스로 천만 또는 1천 5백만, 2천만 불교도라고 자랑처럼 얘기를 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내세우고 있는 천만, 이천만 불교도가 제대로 불교를 이해하고 신앙하는 신도의 숫자라고 한다면 적어도 한국불교의 위상과 이미지, 그 역할은 오늘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한국사회가 이처럼 모순과 혼란으로 소용돌이치는 사회로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불교의 위상과 이미지가 추락하고 한국사회 또한 모순과 혼란이 되풀이되고, 소용돌이치는 사회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그 일차적인 책임이 불교에 있다고 보여집니다.

최고의 가르침을 자랑하고 1천6백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불교가 그 아름다운 전통을 현실적으로 되살리지 못했기에 오늘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통과 신도의 규모가 큰 만큼 불교가 혹은 불교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이 역할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의 불교, 한국사회라는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 부처님을 제대로 아는 일

그렇다면 왜 한국불교는 그런 위대한 전통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불교를 실천하지 못했을까요? 물론 거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진단한 바로는 제일 첫째 조건이 한국불교가 부처님을 제대로 모른다는 것입니다. 즉 부처님을 잘 알기 위한 노력을 소홀히 해 왔다는 것이죠. 부처님에 대한 노력이 소홀히 되다보니까 불교를 제대로 알 수 없었고, 불교를 제대로 알 수 없다보니까 불교를 제대로 신앙할 수 없었습니다. 불교를 제대로 신앙할 수 없으니 1천만, 1천 5백만, 2천만이라는 불자의 숫자는 그야말로 오합지졸이 될 수밖에 없었겠지요. 아무리 숫자가 많다고 해도 그것이 오합지졸일 경우는 사회를 이끌어가고 사회를 만들어가는 지도적 역량으로 그 역할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 불교계의 부정할 수 없는 현실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교를 실천하는데 있어서 왜 부처님을 잘 알아야 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모든 불교사상과 정신의 근본 뿌리가 부처님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사상과 정신의 출발점이요, 원천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을 떠나서는 불교를 얘기할 수도 없고 불교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을 제대로 알지 않고서는 불교를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마치 한 나무를 놓고 본다면 뿌리와 같은 것입니다. 나무의 뿌리를 건강하게 가꾸고 보호하지 않는다면 나무는 건강하게 자랄 수도 없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낼 수도 없고, 훌륭한 결실을 맺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국불교는 불교의 뿌리요, 원천이요,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부처님을 제대로 알고 따라가는 작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얘기죠. 천릿길도 첫걸음부터 시작해야 된다는 말이 있고, 첫단추를 잘 꿰야 된다는 말이 있듯이 첫출발의 방향을 잘못 잡다보니 그다음 부분도 꼬이게 되고 빗나가게 되는 그런 오류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 한국불교는 반쪽불교?

우리는 모든 도량마다 부처님을 잘 모시고 있습니다. 또 『화엄경』이라든가 『금강경』, 『능엄경』, 『법화경』 등 불교 최고의 경전들을 통해서 부처님에 대해서 배우고 신앙적으로 부처님을 받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혹자는 왜 우리가 부처님 아는 일을 소홀히 했다고 하고, 부처님 따르는 일을 소홀히 했다고 얘기하는가? 이렇게 물어 올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불자님들도 그동안 부처님 공부를 끊임없이 했다고 믿는데 그건 사실이죠. 곳곳에 법당을 지어 불상을 모시고, 경전 공부를 하고, 교리공부를 하면서 우리는 부처님에 대해서 배우고 익히고 그랬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떤 일을 할 때 올바르게, 제대로 하지 못하면 결국 수고는 더 많이 하고 그 수고한 것에 비해서 결과는 시원치 않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올바르게 했을때만 수고한 것 이상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한국불교는 부처님을 배우고 알려고 해 왔지만, 올곧게 해온 것이 아니라 한쪽 부분만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부처님은 기독교에서 얘기하고 있는 신격화 되어진 부처님과 다르지 않습니다.

가령 우리 스스로를 점검하는 차원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봅시다.

부처님이 설사병 때문에 죽을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설사병 때문에 고생하는 부처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여러분들 상상이 되십니까? 혹은 부처님이 설사병 때문에 죽을 고생을 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은 있습니까?

부처님이 일생동안 밥을 얻어 드셨는데 하루는 밥을 얻으러 갔다가 밥을 얻을 수가 없어서 그날 하루는 굶어야 했답니다. 그렇다면 밥을 굶는 부처님의 모습, 그 얼굴이 그림으로 그려지십니까? 과연 밥을 못 얻어서 굶어야 될 때 부처님의 표정은 어땠을까요? 여러분은 밥을 못얻어서 굶는 부처님의 얘기를 들어보셨습니까? 우리는 부처님이 똥을 누었다는 얘기도 경전에서 배운바가 없고 밥을 굶었다는 얘기도 경전에서 들은 바가 없고 설사병을 앓아서 죽을 고생을 했다는 얘기도 배운 바가 없습니다.

『화엄경』이나 『금강경』이나 『원각경』, 『능엄경』, 『법화경』 등 수 많은 경전에는 부처님의 그런 인간적인 모습, 또는 역사적으로 사실적인 모습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부처님은 복덕과 지혜가 원만구족해서 뭐든지 저절로 이루어지는 분, 혹은 뭐든지 마음만 먹으면 금방 성취되는 분, 그래서 아무런 불편함도 부족함도 없는 분, 그런 부처님만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부처님께서 일생 동안 얼마나 삶이 고달프고, 아프고, 슬프고, 불행했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즉 역사적인 사실로서의 부처님, 때에 따라서는 외롭기도 하고 그리웁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졸리웁기도 하고 배고프기도 한 인간적인 부처님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대지에 두 발을 딛고 숨을 쉬고 그 곳에서 우리와 함께 웃고 울면서 사는 부처님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는 것이죠. 다시 말해 우리 손이 닿을 수 없는 부처님만 우리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와 전혀 별개의 존재로서 아득히 저 높은 위치에 계시는 부처님을 모셔 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가 부처님을 따라서 갈 수가 있겠습니까?


* 부처님의 참모습

따라서 오늘 말씀 드리고자 하는 주제는 부처님의 생애,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 부처님이 탄생하면서 외치셨다고 하는 탄생게(誕生偈)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오늘부터 세 차례에 걸쳐서 첫 시간에는 부처님 생애(生涯)와 탄생(誕生), 둘째 시간에는 전법(傳法) 선언문(宣言文)에 대한 이야기, 셋째 시간에는 부처님이 열반(涅槃)에 드실 때 남긴 말씀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불교를 올바르고 바람직하게 또는 효과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처님을 잘 아는 일부터 시작해야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부처님이 무엇을 고민했는지 무엇을 가슴아파했는지 혹은 무엇을 좋아했으며 무엇을 추구했는지 또, 화날때는 어떻게 했고, 슬플때는 어떻게 했는지 그리고 부처님이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이 모든 것을 우리가 정확하게 알고 부처님을 본받고 따라가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분들은 불교를 신앙하고 그 동안 불교공부를 열심히 해 오신 분들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가장 가슴 아파하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청중들 중에 '무명'이라고 답한다.)

물론 가슴 아파하신 일이 어디 한 두가지겠습니까만은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것을 짚어낸다면 그것은 결국 모순과 고통을 재생산해내는 무지와 탐욕입니다.

이 무지와 탐욕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이것이 부처님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을 겁니다.

무지와 탐욕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모든 문제가 풀릴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무지와 탐욕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문제를 찾고 있습니다. 그것이 기막히게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 이유는 무지와 탐욕을 놓아 둔 채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죠. 무지와 탐욕의 문제를 덮어 놓고 천하를 덮었다 뒤짚었다 하는 업적을 이뤄낸다 하더라도 결코 인생에서 겪는 문제의 근원은 결코 풀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부처님의 기본 관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저 돈과 권력, 명예 등을 통해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죠. 이 부분이 부처님의 고민이요, 가슴 아픈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대자비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불교를 실천한다고 하는 것은 인생에 대한 새로운 시작이요, 새로운 눈뜸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또는 늦었거나 늦지 않았거나 또는 불교를 많이 공부했거나 공부하지 않았거나, 오래했거나 처음 시작하는가에 관계가 없습니다. 다만 불교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길을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불교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첫시작, 즉 부처님을 잘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 된다는 점을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처님의 탄생의 의미. 부처님이 탄생에 즈음해서 하셨던 말씀을 중심으로 풀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자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일체개고 오당안지(一切皆苦 吳當安之)' 또는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 오직 나홀로 존귀하다. 삼계가 고통받고 있으니 온 세상의 모든 고통을 내가 마땅히 편하게 하리라'

우리는 이것을 부처님의 탄생게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렇게만 말합니다. 당장 부처님 탄생게만 놓고 보더라도 한국불교가 얼마나 부처님 아는 일을 소홀히 했는지 혹은 부처님을 건성으로 알았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탄생게 내용을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것만 하면 반쪽입니다.

그 동안 한국불교는 기껏해야 반쪽 불교를 한 셈이죠. 반쪽은 절반인 것 같지만 또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전무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남자와 여자라는 관계를 놓고 볼 때, 남자가 반쪽이고 여자가 반쪽이죠. 그래서 남녀가 만나 온전한 하나를 완성한다고 봅시다. 남자와 여자라고 하는 관계가 바람직한 만남의 관계와 협조 체제가 이루어졌을 때 아들과 딸이라고 하는 새로운 가치. 즉 아들과 딸이라는 새로운 결실을 창출해 낼 수 있다는 겁니다.

다시말해 여자가 없는 남자, 혹은 남자가 없는 여자가 자식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이유로 반쪽만 있다는 얘기는 전무하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가치를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인데 물론 인간의 가치가 아들과 딸을 낳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다만 이것은 하나의 비근한 예로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탄생게를 놓고 볼 때 한국불교는 줄기차게 반쪽만을 얘기하고 있어요.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것은 귀가 따갑게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 오신날만 되면 불자들은 이 말을 외우고 다니죠. 그러나 실제 내용은 '천상천하 유아독존 일체개고 오당안지' 혹은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 이렇게 돼야 온전한 탄생게가 되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강조점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삼계개고 아당안지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중생들이 고통받고 있으니 내가 그들을 편안케 하리라는 여기에 강조점이 있어요.

그런데 한국불교는 정작 강조해야 할 부분은 접어 놓고 덮어 놓고 한쪽만을 계속 주장해왔고 한쪽만 붙잡고 달려왔다는 얘기입니다. 이 말은 곧 뼈아픈 상징성을 갖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즉 한국불교가 절름발이 불교였다는 것이죠. 또한 한국불교는 반쪽 불교였고, 한국불교가 그 동안 온전한 자기 모습을 갖고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 탄생게 내용의 반쪽만이라도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인식하며 실천해 왔는가? 돌이켜 볼 때 많은 맹점과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 부처님 탄생게를 연기법으로 해석

먼저 '천상천하 유아독존'(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나홀로 존귀하다.) 여기서 '나'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불교공부를 한 사람들은 생명의 존엄성, 육근(六根), 평등사상, 마음, 불성 등을 떠올릴 것입니다. 물론 모두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고 하면 실제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참자아, 불성, 자성, 진아(眞我), 마음, 영혼 등을 떠올리잖아요. 시간과 함께 변화하고 허무하게 사라지는 육체와는 다른 영원 불멸한 무엇. 즉 신성스런 무언가를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이해한다면 기독교적 이해는 될지 몰라고 불교적 이해는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에서는 욕을 얻어먹는 일이지만 한국불교는 간판은 불교를 걸어 놓고 내용적으로는 기독교적인 불교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할 때 이 말의 의미를 제대로 우리가 파악하고 이해하려면 먼저 부처님의 가르침, 즉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바로 연기법(緣起法)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법을 연기법이라고 한다면 불교는 연기법을 떠나서 이야기되지 않습니다. 어떤 교리를 해석하더라도 연기법의 논리로 해석해야되는 거죠. 연기법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틀리게 되어 있어요. 연기법에 맞지 않으면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불교는 연기법이예요. 그것이 핵심이기도 하고 생명이기도 합니다. 삼법인(三法印), 사성제(四聖제), 십이연기(十二緣起) 또는 마음, 불성, 자성 등 불교적 개념화된 모든 것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철저하게 연기법의 사상과 정신에 맞아야되고 또 그래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깨달은 연기법은 무엇인가요?


* 연기법은 곧 한몸 한생명사상

연기법은 달리 표현하면 관계성의 진리입니다. 우주 삼라만상 유형무형의 모든 것들은 관계속에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서로 밀접하게 의지해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분리되어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로따로 라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성립될 수 없다는 뜻이죠. 세상 모든 이치가 연기법, 즉 관계성의 진리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의식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축원문(祝願文)에 보면 '제망중중 무진삼보 유원무진 제망찰해(諸網衆衆 無盡三寶 唯願無盡 諸網刹海)' 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여기서 제망중중, 제망찰해는 연기법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 연기법의 논리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을 해석해 보자구요. 온 우주 삼라만상 두두물물 유형무형의 것이 관계속에서 성립되고 관계에 의해서 활동 유지되고 있다는 말인데, 이것이 연기법의 논리라는 말이죠. 그러면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는 물질의 현상, 혹은 육체의 현상과는 별도로 영원불멸한 마음이나 자성, 불성, 영혼 등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어떻습니까? 가능하겠습니까?

만약 허무하게 변화하고 사라져 버리는 이 육체와 물질 현상과는 별개의 것으로 영원 불멸한 마음이나 불성, 자성, 영혼 등이 따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관계성의 진리하고는 정반대의 얘기가 되잖습니까. 안그러겠어요?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서 진지한 반성이 필요합니다. 혼돈하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죠. 정신차려야 될 문제죠. 즉 관계성의 진리, 연기법으로 다시 한번 해석해 봅시다.

자 여기에 내 육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 육신안에 어떤 형태로든 작용하고 있는 내 생명이 있고 우린 그것을 자아 혹은 나라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나라고 하는 것이 존재할까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듯이 나라고 하는 것은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 것일까? 너와는 별개의 것으로서의 나, 너와는 다른 분리된 나, 하늘과 땅과는 무관한 나라는 존재가 정말 있는 것일까? 생각해 봅시다. 있다면 그것은 연기법이 아니죠.

여기 한 컵의 물이 있습니다. 만약 이 한 컵의 물이 여러분의 생명을 좌우한다고 하면 믿겠습니까? 안 믿어집니까? 그렇다면 물을 마시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한 컵이라고 하니까 우리가 한 컵에 속고 있는데 그렇다면 물이 여러분의 생명을 좌우한다고 하면 인정하겠습니까? 물을 마시지 않고서는 우리가 살아갈 수 없잖아요. 물을 떠난 인간의 생명은 존재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물은 곧 인간의 생명이다. 이 논리가 성립이 되겠지요. 어떻습니까? 물은 곧 인간의 생명이다라는 논리가 성립된다면 다시 한번 물어봅시다.

물과 인간의 생명, 혹은 물과 사람의 목숨 중 가치를 따져볼 때 무엇이 더 중요할까요? 평등하잖아요. 물이 곧 인간의 생명인데 다를 수가 없잖습니까? 물이 곧 인간의 생명이니까 물의 가치와 인간의 생명의 가치는 평등하잖아요. 왜 평등할까요? 그것은 하나이기 때문이죠. 물이 곧 인간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물 없이 인간의 생명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결국 하나이기 때문에 평등한 거죠. 왼손과 오른손은 불평등 합니까? 불평등할 수가 없잖아요. 사실 기능은 달라요. 그러나 이것을 불평등 하다고 얘기할 수 없다. 하나이기 때문에 둘다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입니다.


* 부처님의 탄생게는 곧 무아사상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물이 곧 인간의 생명이다. 따라서 물과 인간의 생명은 평등하다.'라는 결론에 닿았는데 여기서 생명이라는 것, 목숨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참 귀중한거죠.

어쩌면 우리는 한 목숨을 위해서 살지 않습니까? 이 한목숨 건강하고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 또는 한목숨 자유롭고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사는 거 아닙니까? 돈을 버는 것도, 좋은 옷을 입는 것도 좋은 집을 마련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 한목숨을 위해서라는 거죠.

그렇다면 그렇게 귀중한 목숨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보호하고 지켜야겠죠. 그런데 우리는 그 동안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내 목숨과도 같은 물을 내 목숨처럼 귀중하게 대접했습니까? 철저하게 독립되어 있는 '나' 하나를 위해서 나 하나만을 편안케하고 즐겁게 하고 배부르면 된다는 생각으로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모습, 현재 우리 사회의 현주소입니다.

물이 곧 생명이요, 나와 물이 평등하듯 이 논리를 확대시켜 본다면 물이 곧 인간의 생명이었던 것처럼 저 하늘에 떠 있는 태양도 인간의 생명입니다. 하늘에 태양이 없다면 인간의 생명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밤 하늘을 밝히고 있는 달과 별 또한 인간의 생명입니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하늘에 흘러 다니는 바람, 우리가 호흡하고 있는 산소.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있는 대지,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산천초목과 우리 귓가에 들리는 새소리 등 모든 것들은 내 목숨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처럼 우주삼라만상에 존재하고 있는 유형무형의 모든 것들의 총체적인 관계, 하나라도 제외되면 안되죠. 이 총체적인 관계에 의해서 나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고 내 생명이라는 것이 존속·유지될 수 있습니다. 이런 논리로 보면 세상에 '나' 아닌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나' 아니죠? 물이 '나' 아닌가요? 태양이 '나' 아닌가요?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대지가 '나' 아닌가요? 어떻습니까? 결국 '나' 아닌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사상(無我思想)입니다.

결국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은 고유의 개성과 가치라고 하는 측면에서 생명의 존귀성을 강조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와 함께 이 우주 삼라만상 유형무형의 모든 것이 곧 '나'라고 하는 생명사상을 뜻하고 있습니다. 내 생명 아닌 것이 없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곧 '천상천하 유아독존'입니다.


* 우주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곧 한몸, 한생명

따라서 온 우주 삼라만상 두두물물 유형무형의 모든 것들이 곧 나요, 내 생명이라고 한다면 미워야 할 대상도 죽여야 할 대상도 존재할 수 없겠죠. 경쟁해서 이겨야 할 대상은 또 어디에 있을까요? 즉 내가 평화롭고 편안하고 건강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물을 살리고 흙을 살리고 바람과 구름, 태양, 달과 별을 살려내야만 '나'라고 하는 생명이 존재하고, 존속, 유지될 수 있고 건강하고 평화로워질 수 있다는 얘기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 동안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철저하게 자기 중심의 이기적인 방식으로 삶을 살아왔어요. 또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는 철저하게 인간중심의 이기적인 사고로 삶을 살아왔다는 거죠.

그 결과 개인소득 만불, 혹은 경제성장이 이뤄지고 더 나아가서는 고도의 기술사회, 모든 것이 기계화 자동화되어지고 직장도 재택근무를 하게 되었죠. 그런데 첨단기술과 경제적 풍요 속에 살면서도 실제 우리의 삶은 더 불안하고 불만족스럽고 더 초조하고 더 각박하고 고달프다고들 말합니다. 삶이 공허할 수밖에 없는 결과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생명에 대한 무지와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무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왜곡된 앎, 이런 것들 때문에 문제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았고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으니까 해결도 제대로 될 수 없었던 것이죠.

앞서 강조했듯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은 달리 표현하면 한몸, 한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온 우주 삼라만상 두두물물 유형무형의 것은 내 생명 아닌 것이 없다, 즉 동시에 한몸 한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고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불교에서는 지혜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 한몸, 한생명인 지구의 모든 생명들이 무지와 집착에 의해서 고통받고 있습니다. 내 생명이 고통받고 있으니까 어떻게 해야겠어요? 당연히 해결해야 겠죠.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삼계가 모두 고통이니 내가 마땅히 그들을 편안케 하리라.'(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지혜와 자비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 시대에 맞게 재창조되는 불교사상과 정신

부처님이 태어나신 것도 한몸 한생명의 사상과 정신을 실현하기 위함이었고 부처님이 출가하고 성도하고 전법하고 열반하신 것도 결국 한몸 한생명의 사상과 정신을 일류에게 몸소 가르치고 역사속에 부연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이것 말고는 부처님이 한 일도 없고 또 하고자 한 일도 없었어요.

2600년이라는 불교의 역사도 결국 하고자 했던 일이 한몸, 한생명의 사상과 정신 곧 지혜와 자비의 길을 실현하고자 함입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우리가 짚어서보면 부처님을 제대로 알면 불교를 바로 알게 돼 있습니다. 부처님을 제대로 알고 따라가면 불교를 제대로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평화와 자유, 아름다움 혹은 가치도 실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한몸, 한생명의 사상과 정신을 실천할 수 있도록 체계화시키는 것이 불교교리입니다. 그것은 삼법인, 사성제, 십이연기,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 등을 포함하는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 교리 속에 담겨 있습니다.

또 그 전통이 계승되고 재창조되어서 등장하고 있는 것이 대승불교의 육바라밀(六波羅蜜), 십바라밀(十波羅蜜)입니다. 또 후대에 오면서 그 사상과 정신은 참선불교, 선종, 밀교, 정토불교로 등장하게 되죠. 여기서 확실한 것은 2천 6백년 동안에 형성되어진 모든 불교의 사상과 정신, 그리고 불교역사와 문화적 전통들이 한몸 한생명의 사상과 정신. 즉 지혜와 자비의 정신을 바탕으로 시대의 변천과 함께 재창조되어지고 재정리되어져서 그때 그때 알맞게 실천될 수 있도록 변화한 것이 불교사상과 정신이고 역사와 전통이라는 것입니다.


*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로 돌아가는 삶

그렇다면 그 사상과 정신, 역사와 전통의 입장 즉 그런 문제의식과 사고방식으로 오늘날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살펴봅시다.

소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세계화를 천명했습니다. 세계화, 자유시장. 무한경쟁 등 귀에 익숙한 얘기들이죠. 그들은 세계화, 무한경쟁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생존전략으로서 경쟁력 강화를 내세웠습니다. 이것이 20세기를 마감하고 21세기를 맞이하면서 문민정부가 제시한 이 나라 정책방향이었고 이 나라 국민 대중들에게 요구한 삶의 방향이었습니다.

무한경쟁, 경쟁력강화, 최고, 일류, 강자, 승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얘기죠. 경쟁력 강화의 논리가 그렇잖습니까? 강자만 살고, 승자와 일류만 살아 남는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일류, 강자, 승자가 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21세기에 살아남기 위해서 말이죠.

그런데 이 말이 얼마나 무섭고 비인간적인 말인지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또한 얼마나 파괴적인 말인지, 얼마나 야만적인 말인지 또한 반불교적이고 반생명적인 말인지 알고 계십니까?

오늘날 한국사회 더 나아가서는 전 지구사회를 휩쓸고 있는 것이 이렇게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이고 파괴적이고 반불교적인 사상과 정신, 사고와 삶의 방식들을 요구하고, 우리 한국사회를 나아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몸 한생명의 사상과 정신, 참생명의 정신을 알고 있는 불교인들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누구 한사람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느 불교인 한사람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불교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진정 우리가 부처님을 제대로 믿고 따른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돌아봐야 합니다.

과연 1천 6백년 불교의 역사를 자랑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 불교도들은 찬란한 불교문화의 전통을 외치면서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있을까? 이것이 과연 정직한 태도인가, 바람직한 태도인가, 성실한 태도인가 이렇게 되짚어보면 그야말로 우리는 부끄럽고 답답하고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결국 이 논리는 너 죽고 나 살자는 논리입니다. 내가 올라가기 위해서는 너를 짓밟겠다, 혹은 내가 앞서가기 위해서 너를 제쳐놓겠다는 것이죠. 이것이 무한경쟁의 논리가 아니겠습니까?

여기에 어찌 인간적인 관계가 있고 아름다움과 평화로움이 존재하겠습니까? 인간의 자유와 여유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밀림의 법칙, 야만의 법칙, 맹수의 법칙입니다.

여러분들 동물의 왕국을 보셨죠. 거기에는 오로지 강자만이 살아남습니다. 어떻게 만물의 영장이며 역사를 이끌어 왔다는 인간이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이고 파괴적인 사고와 삶을 선택하면서 마치 그것이 대단한 것인양 얘기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말이 안되는 얘기죠.

우리가 진정 인간이기 위해서는 역사발전을 이끌어 온 주체로서, 희망적인 미래를 꿈꾸기 위해서는 적어도 '나' 만이 사는 길 혹은 강자, 승자, 일류만이 사는 길을 찾기 보다는 함께 사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너도 살고 나도 살고 인간도 살고 자연도 살고 여기에 한걸음 더 나아가서 기왕이면 일류가 아닌 이류, 삼류, 사류, 오류들과 함께 가슴 아파하고 그들을 끌어안고 그들과 함께 삶을 향유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해야합니다. 그 길을 함게 모색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인간다운 세상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적어도 그런 사회, 그런 삶의 여건들을 가꿔가는 역할을 해냈을 때 우리는 부처님 제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삶의 터전들을 가꾸기 위해서 애쓴다고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부처님의 제자요, 보살행을 실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새롭게 발심하는 불교, 불자의 모습

이것이 엄연한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무지와 탐욕, 전도몽상의 사고와 삶의 태도를 벗어나려고 하는 노력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 전세계가 또는 우리나라 정부역시 장밋빛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경제가 성장하면 실업자가 줄어들고 개인소득이 높아지면 우리 삶이 더 넉넉해지고, 첨단기술 사회가 되면 모든 삶이 편리해지고 그 결과 우리가 꿈꾸는 좋은 세상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쓸 수 있고 편리해지면 좋은 세상이라는 얘기죠.

정말로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쓸 수 있고 편리해져서 좋은 세상 된다고 한다면 우린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라도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경험은 그렇게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역사적인 경험은 결코 물질적인 풍요에서 인간의 행복을 얻을 수 없고, 좋은 세상이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최근 어떤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보릿고개, 즉 배고픈 시절에 우리나라 국민평균개인소득이 약 6십불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1만불을 얘기하다가 거품을 걷어내고 6천불에서 만불이라고 얘기합니다. 가령 6천불만을 얘기하더라고 보릿고개 시절에 비한다면 육십불에서 백배를 더 많이 갖고, 많이 쓰고, 백배 더 편리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 사람들이 느끼는 자기 삶에 대한 행복감은 6십불 시대를 살던 사람들이 훨씬 만족감이 높고 불만족감이 낮다고 합니다. 오늘날 6천불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불만족이 훨씬 더 높고 만족감이 낮다는 통계결과가 나왔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결국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쓰고 더 편리해지면 행복해진다는 것과 좋은 세상이 된다는 논리는 허구임이 증명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나라 지도자들은 또다시 물질적인 풍요라는 허구의 세상을 끊임없이 제시하면서 사람들을 몰고 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소유는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지도 혹은 결코 자유롭게 하지도 않습니다. 소유는 인간을 평화롭게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앞서 말씀드렸듯이 무지와 탐욕을 스스로 깨고 나와야 합니다. 무지와 탐욕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개인소득 만불이 아니라 십만불이 되더라고 모순과 혼란, 갈등과 대립, 불만과 불안은 오히려 가중되면 가중되었지 절대로 줄어들지 않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부처님의 사상과 정신, 그 분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알려고 할 때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를 올바르게 풀어낼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처님을 제대로 알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의 문제를 근원부터 해결하려는 노력을 해야합니다. 그 결과 우리의 꿈과 이상을 올바르게 실현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지 않을까요? 이제부터라도 부처님을 제대로 아는 일 ,불교를 제대로 실천하는 일에 새롭게 발심하는 불교, 불자의 모습을 기대하면서 오늘 제 얘기를 끝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