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성찰

왜 시장경제는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가_ 나카타니 이와오

정정진 2011. 2. 5. 21:32

 

왜 시장경제는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가

 

'현대인은 경제학자를 비롯해서 시장메커니즘을 마치 자연현상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실은 시장 그자체가 역사적으로 보면 대단히 특이하고 새로운 것'이라는 폴라니의 지적은 그것만으로도 경청할 가치가 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폴라니는 저서 [대전환]에서 근대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해서도 중요한 비판을 하고 있다.

 

폴라니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근대에 들어와 등장한 시장경제는 이윽고 자본주의 경제가 되었는데, 이 자본주의의 발전 속에서 사람은 본래 교역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에 가격을 붙이고 거래를 하게 되었다. 실은 그것이 시장경제가 '악마의 멧돌'이 되어 사회의 구조를 왜곡시키고, 최종적으로는 인간성도 파괴하고 마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이것이 폴라니의 주장에서 극히 중요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거래하는 일이 시장경제를 이상하게 만들었는가. 그것은 노동, 토지, 그리고 화폐의 거래라고 그는 말한다. 원래 이 세 가지는 상품으로서 다루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금단의 상품'이었는데 근대의 자본주의에서는 이들을 시장에서 거래하게 되었다. 그것이 모든 잘못의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확실히 현대의 경제에서는 노동이나 토지, 혹은 화폐를 거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다. 경제학에서 '노동시장'이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우리들이 제공하는 노동에는 임금이란 이름의 가격이 붙어있다. 또 근대국가라면 그 영토 안에 '누구의 것도 아닌 토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토지에 가격을 붙이고 거래를 한다. 화폐에 대해서도 지금은 일반 사람들조차 환거래를 하고 있고, 유가증권 같은 금융상품은 일종의 '의사화폐'로서 대규모로 거래되고 있다.

 

따라서 폴라니가 '노동이나 토지, 화폐를 상품으로 만든 것이 잘못의 시작'이라고 주장하면 많은 사람들은 '그럼 도대체 어디에 잘못이 있느냐'고 당혹할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다시 폴라니의 설명을 들어보면 그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즉 '원래 상품이란 무엇인가. 상품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재생산이 가능한지 여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장에서 상품이 거래되기 위해서는 만약 그 상품에 가격이 붙어서 팔렸을 때 그것과 같은 것을 재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 암묵의 전제가 되어 있다. 다 팔렸을 때 같은 것을 다시는 만들 수 없다면 '상품'이 될 수 없다는 것이 폴라니의 정의다. 사실 단 한번밖에 거래할 수 없는 상품은 적어도 시세는 형성되지 않는다. 폴라니의 주장도 맞는 것이다.

 

'노동의 상품화'가 문제의 시작

 

폴라니는 여기에서 다시 논리를 발전시켜 현재 우리들이 노동을 '상품'으로 팔고 있는 것이 크게 잘못된 생각이라고 주장한다.

현대인은 회사에 대해서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대가로서 월급이나 시급이라는 형태로 보수를 얻고 있다. 급여라고 하는 것은 노동력의 댓가이지만, 이런 형식으로 노동력을 매매하게 된 것은 극히 근대적인 현상이다. 그 이전에도 인간은 분명 '노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노동력을 팔아서 생활에 필요한 양식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농민은 자기가 경작한 농작물로, 어부는 자기가 망으로 잡은 고기로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마을의 대장장이는 칼을 만들어서, 상인은 자기가 사들인 상품을 파는 것으로 돈을 벌었다. 다시 말해서 무언가의 '상품'을 팔거나 만드는 것으로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현금수입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근대 이후의 노동자는 무언가를 만들고 거기서 얻은 보수로 살고 있는가. 물론 그렇게 해서 돈을 벌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의 경우는 다르다. 공장노동자이든, 봉급생활자이든, 하루 8시간이나 10시간, 또는 12시간 등으로 할당된 일을 함으로서 급료를 받아 생활을 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즉 현대의 노동자는 일하는 시간을 회사나 공장에 제공하는 것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폴라니는 말한다.

<우리들이 받고 있는 임금이란 자신의 인생을 잘라 팔아서 얻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과연 시간은 재생산할 수 있는 것인가. 인생은 재생산할 수 있는 것인가. 물론 불가능하다. 인간은 단 한 번의 시간, 단 한 번의 인생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한번밖에 없는 순간을 매매한다는 것은 실로 비인도적인 것이며, 윤리에 반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폴라니는 통렬한 비판을 하는 것이다.

 

다 알고 있는 것처럼 18세기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근대자본주의가 탄생하자, 런던이나 리버풀 같은 도시부에서 근대공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면직물로 대표되는 다양한 공장이 세워지자 농촌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와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대부분 인클로저 운동으로 토지를 박탈당한 농민들이었는데, 그런 사람들이 현금수입을 얻기 위해 도시에 대량으로 유입하여 숙련노동자가 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근대사회'가 탄생한 것이다. 이처럼 토지를 빼앗긴 노동자들은 경작할 토지를 가지고 있을 리가 없고, 직인으로서 기술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돈을 얻기 위한 수단은 공장에 다니면서 하루 자신의 인생을 잘라 파는 것 이외의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불행이란 무엇인가. 그 상징이 '실업'이고, '빈곤'이었다는 것이 폴라니의 생각이다.

 

자본주의가 빈곤을 만들어낸 이유

 

물론 근대사회의 성립 이전에도 빈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생긴 빈곤은 과거의 빈곤과 전혀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분명히 중세의 농민들도 풍요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입장에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에게는 적어도 경작할 수 있는 토지가 있었고, 기근으로 먹을 것이 없으면 들이나 산에서 먹을 것을 채집하러 갈 수 있었다. 그래도 어려우면 이주라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근대 영국에 등장한 공장노동자에게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조차 없다. 그들은 고용주로부터 언제 해고를 당할지 모르고, 일단 실업을 하면 즉시 생활이 어려워진다. 가지고 있는 현금이 없어도 시골에서는 어떻게든 먹고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도시의 주민은 현금이 없으면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더욱 나쁜 것은 근대적인 도시가 생겼을 때 당시에는 기독교 교회나 행정당국이 빈민구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업도 아담 스미스류의 경제사상이 보급되어 시장원리주의가 '상식'이 되자, '빈곤한 것은 본인의 책임이고, 자선사업 같은 것으로 도와주는 것은 오히려 응석을 받아주는 셈'이 된다고 해서 빈민구제에 대한 반대가 거세졌다.

 

영국에서는 16세기 이래 '구빈법'이라고 부르는 법률로 빈민구제활동이 행해지고 있었는데, 근대자본주의의 성립으로 비판을 받게 되었다. 17세기 후반에는 악명 높은 '노역장'이라고 부르는 시설이 만들어져, 그곳에 수용된 빈민은 자유가 박탈된 상황 속에서 강제적으로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출도 허가되지 않는 감옥과 같은 환경에서 억지로 일을 시키는 것을 '구제'라고 불렀던 것이다.

 

더구나 1834년이 되자 '신구빈법'이 제정되기에 이른다. 이 법률에서는 '빈곤은 개인의 도덕적 책임'이라고 정의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부는 실업자를 구제해야 하지만, 그 상태는 '가장 빈곤한 노동자 이하로 머물러야 한다'는 규정까지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빈민구제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신구빈법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생활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법으로 정부의 구제대상이 되는 것은 인권을 상실하는 것과 같아서 일생을 빈민으로서 살아가도록 되어 있었다.(1948년이 되어서야 폐지되었다).

 

이렇게 해서 찰스 디킨즈가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묘사한 것 같은, 그리고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분노를 표시한 것 같은 런던의 비참한 빈민가는 탄생했다. 그곳에서는 10세도 안 된 어린이들조차 하루 8시간의 노동을 해야 했고, 일을 할 수 없게 된 인간은 굴욕 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

 

폴라니는 [대전환]에서 이런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고, <이런 비참한 빈곤의 원인은 노동력, 다시 말해서 인간의 생활조차 상품으로 만들어버린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에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자본주의 아래서 인간은 그저 상품으로서 거래되는 존재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시장원리 속에서는 인간의 존엄 같은 것은 처음부터 '외부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사회를 파괴하고, 인간으로부터 자존감을 박탈하는 악마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폴라니는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노동의 상품화'가 인간으로부터 일의 즐거움을 빼앗아버렸다. 노동자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고역으로서 견디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은 일에서 소외된 것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인심의 황폐'는 여기에 근원적인 원인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토지는 누구의 것인가?

 

이렇게 해서 시장사회의 형성, 그리고 자본주의경제의 발전으로 인간의 존엄은 박탈당하게 된 것이지만, 그 해악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폴라니는 <시장경제 속에서 토지를 매매하게 된 결과 사회적 유대가 파괴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원래 폴라니의 말에 의하면 토지는 팔렸다고 해서 재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상품으로서 거래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토지는 유한한 것이고, 인간은 토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토지는 생활의 기반이고, 사회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근대 이전에는 토지가 상품으로서 매매되지 않았다. 유럽 중세의 영주나 국왕이 가지고 있던 것은 그 토지에 대한 징세권에 지나지 않고, 토지 그 자체를 소유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에도시대의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50만석, 100만석이라는 말이 보여 주듯이 막부나 각 번이 가지고 있던 것은 농지가 생산하는 수확물에 대한 징세권에 지나지 않았고, 소유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막부는 '쿠니가에'라고 하면서 자유롭게 다이묘들의 지배 영토를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이묘는 영지의 소유자가 아니기 때문에 빼앗겨도 불평을 할 수 없었다. 이것은 도시의 토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다이묘가 에도에서 머물 때 저택조차도 막부로부터 사용하도록 할당을 받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토지는 공공의 것으로 천하의 것이라는 의식은 양의 동서를 묻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토지에 대한 의식은 근대의 성립과 함께 붕괴된다. 예를 들면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이 제정한 근대민법(나폴레옹법전)속에 처음으로 토지의 매매에 관한 규정이 생겼다. 그것을 계기로 토지는 '개인의 사유재산'이라는 사상이 급속히 일반화 되었다.

 

일본의 경우에도 메이지유신으로 토지는 공공의 것에서 사유물이 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그 출발점이 된 것은 1873년에 실시된 '지조개정'이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는 농지에 대한 과세가 물납에서 금납이 된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더 혁명적이었던 것은 지조개정으로 일본의 토지 '소유자'가 공식으로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토지의 사유화 재산화는 시대의 요청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근대자본주의는 토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으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토지는 선조로부터 받은 것'이라든가, '신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농지를 인간 마음대로 다른 사람에게 팔든가, 용도를 바꿀 수 없게 된다. 농촌에서는 공유지로서 사용되고 있는 토지나 삼림이 있는 경우가 많은 데, 이것도 소유자가 확실하지 않으면 재개발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토지가 개인의 소유물이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 처분, 계약해도 아무런 제한을 하지 않는 체제로 이행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토지사유화가 사회나 환경을 파괴했다

 

그러나 이 같은 토지의 사유화와 상품화가 무엇을 초래했는가

이미 설명했지만 영국에서는 18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인클로저'운동이 확산되었다. 근대자본주의의 성립에 따라 그때까지의 소규모농업으로부터 대규모농업으로 전환이 필요해졌는데, 그래서 대자본가들은 토지를 마구 사들여서 그곳에 살고 있던 농민들을 쫓아냈다. 그 결과 살 토지를 잃은 농민은 도시로 유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공장노동자가 되었는데, 폴라니는 <여기서 영국의 전통적인 사회는 해체되고, 사람들의 유대는 사라지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폴라니의 말에 의하면 인간은 집단생활, 정주생활을 하게 된 다음부터 문명이나 문화를 발달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토지와 인간이 결합되어 그곳에 지연이 생겨나서 인간다운 문화나 문명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자본주의의 출현으로 인간은 문화의 기초가 되는 토지를 상품으로서 매매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토지와 인간의 연결이 끊어지고, 사회적인 연대가 사라져 문화 그 자체도 파괴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근대의 문화는 불행해졌다는 것이다.

 

이 같은 폴라니의 지적은 현대에서는 당연한 것이 된 핵가족이나 지역공동체 붕괴 등의 문제를 예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와 함께 근대자본주의가 토지를 사유물로 생각하게 된 것이 오늘의 환경문제를 초래했다는 것도 강조하고 싶다.

 

근대법의 사유재산제도는 이미 설명한 것처럼 사용,처분,계약의 자유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소유자는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처분해도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으며, 누구에게 팔거나 빌려주는 것도 자유이므로 그것을 국가나 권력자가 마음대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근대민법의 대전제다.

 

이런 사유재산의 사상이 근대사회를 만들어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사상은 그대로 '자기 것이면 무엇을 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토지조차도 사유재산이므로 어떻게 사용해도 괜찮다고 하면, 그곳에 자라고 있는 나무를 마음대로 잘라버려도 누가 뭐랄 수 없는 것이고, 그곳에 흐르는 개울에 무엇을 버려도 괜찮다는 이야기가 된다. 지면 아래의 석유나 석탄같은 자원도 '사유물'로서 마음대로 처분, 매매해도 좋다는 이야기가 된다. 울창한 삼림을 파괴하고 해변을 매립한다고 해도 그것은 훌륭한 경제활동이고,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을 수 없다는 논리가 나오고 마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 지구상의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는 맹렬한 자연파괴와 환경오염은 다름 아닌 인간의 경제활동 및 영리추구에서 나온 것이다. '경제인'으로서의 인간이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서는 자연을 파괴해도 좋다는 발상이 생기고, 그것이 실천으로 이행된 원점에는 토지사유의 자유화가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환경문제에 대해서는 뒤에서도 다를 예정이지만, 한정된 자연이나 자원을 시장원리에 맡겨 매매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곳에 근대인의 '오만함'이 나타나 있다고 하는 폴라니의 지적은 지금이야말로 경청할 가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머니 게임의 우둔함

 

지금까지 노동력, 토지의 상품화에 관한 폴라니의 논의를 간단히 설명했지만, '화폐'의 상품화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도 간단히 이야기 하고 싶다. 여기까지 읽어온 독자들에게는 이미 자명한 것이겠지만, 폴라니의 사상에서 보면 화폐를 상품으로서 거래하는 근대자본주의제도는 거래에서 교환의 수단에 지나지 않은 화폐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왜곡하는 것이다.

 

화폐란 단순한 기호, 상징이며, 거래에서 사용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데도, 그 화폐가 마치 상품처럼 시장에서 매매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허망한 것이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그것은 바로 '머니게임'이며, 실체가 따르지 않는 투기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래도 자본주의경제의 초기에서는 아직 화폐가 금으로 보증을 받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각 나라가 발행할 수 있는 화폐는 그 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금의 총액과 대응하고 있어, 지폐를 은행에 가지고 가면 그에 상당하는 가치의 금을 입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금태환제도 또는 금본위제도라고 부른다.

 

물론 이 금에 대해서도 토지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것이고, 한정된 자원이므로 그것을 거래하는 것은 커다란 모순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래도 아직 금본위제가 기능을 하고 있던 동안에는 화폐가 독자적으로 돌아다니는 데 대해서 일정한 제약조건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라는 '악마의 멧돌'이 돌아가기 시작하자 이런 금본위제는 대응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20세기초두, 제 1차대전 직후에는 금본위제를 일시적이나마 정지하는 국가가 잇달아 등장했다. 팽창한 전비를 지불하려니 금과의 태환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해졌던 것이다. 그래도 일단은 금본위체제는 재정비되었지만 이번에는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으로 다시 금본위제가 정지되었다.

 

이렇게 보면 대공황에 이어 일어난 제2차대전은 대혼란에 빠진 세계경제를 재편하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정의할 수 있는데, 전전의 반성을 기초로 대전 후에는 금본위제의 이념을 채용한 IMF(국제통화기금)체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IMF체제는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1971년에 미국이 금과의 태환을 정지한 것을 계기로 각국이 자유롭게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관리통화제도로 이행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화폐는 이미 금의 보증을 받지 못하는 실체가 없는 상징이 되어버렸지만, 그 상징, 또는 기호를 둘러싸고 머니게임이 벌어지게 되었다. 특히 20세기말에 금융공학이 실용화되자 점점 더 환거래와 증권거래는 복잡괴기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급기야는 '서브프라임 론'이라고 하는 의심스러운 상품까지 만들어지게 되었고, 결국 미국발 금융공황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교묘하게 설득해서 부동산 융자를 해주고, 그것을 작은 구좌로 분할해서 증권화한다는 것은 실로 '악마의 지혜'바로 그것이다. 근대인은 화폐를 상품화함으로서 실로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것이다.

 

* 나카타니 이와오 : 2008년 말 일본 논단에서 꽤 큰 소동이 벌어졌다. '작은 정부, 큰 시장'을 외치며 신자유주의 개혁노선의 전도사를 자처한, 그리고 일본 정부의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의 기틀을 마련해주었던 주인공이 한 권의 책을 통해 "이제까지 내 주장은 잘못됐다"며 '전향'을 선언한 것이다. 주인공은 나카타니 이와오(中谷嚴) 미쓰비시UFJ리서치 & 컨설팅 이사장(66). 미국 하버드대 유학파 출신 경제학자인 그는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 시절 총리자문기관인 경제전략회의에 핵심 멤버로 참여했고, 그가 내놓은 제안들은 고이즈미(小泉) 정권에 인계돼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일본에 들어오도록 했다.이 책은 지난해 말 일본에서 출간된 그의 참회록을 번역한 것이다. 나카타니는 자신이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신봉자가 된 계기를 27세 때(1969년) 떠난 미국 유학의 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밝혔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서 목도한 자유의 풍요에 압도당했다는 것이다. 그가 공부하던 시절 미국에서는 케인스주의가 서서히 퇴조하고 큰 정부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던 시기였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세례를 듬뿍 받고 돌아와 대학 강단에 서게 된 그는 당연히 근대경제학, 특히 시장경제 메커니즘의 위대성을 열렬히 강의했고 정부에도 참여했다.

 

그가 참회와 전향을 선언한 것은 자신이 신봉한 미국식 경제의 붕괴, 그리고 자신이 추진했던 개혁의 결과로 일본 사회에 만연한 양극화 때문이었다. "개혁은 필요하지만 그 개혁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하면 의미가 없고, 사람을 고립시키는 개혁은 개혁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미국을 들여다봐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자유경쟁, 자기책임의 나라이므로 세계 제일의 풍요한 국가가 되었다"고 믿어왔지만 그 자유경쟁, 자기책임이 "압도적 다수는 패배자가 되어 비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처절한 참회를 거쳐 그가 내놓은 대안은 고용의 안정, 정부의 개입, 지방분권, 환경보호 등 신자유주의 교리와 정면 배치되는 것들이다. 지금이야말로 '악마의 맷돌'로서의 시장사회를 해체하고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괴물에 족쇄를 채울 때라는 것이다.
 
세계 경제위기 발생 이후 한국에서도 신자유주의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그러나 나카타니와 비슷한 이력을 가진, 미국 유학파 출신의 주류 경제학자·정책가들로부터의 자성과 참회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들은 일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는 한국의 심각한 상황에 언제까지 눈을 감고 있을 것인가.
 
_ 나카타니 이와오 <자본주의는 왜 무너졌는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