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때문에 태어났고 왜 살아야 하는지를_ 도법스님
잊혀지지 않는 경험이 하나 있다.
한겨울 인적이 없는 눈 쌓인 산길을 혼자 가고 있었다.
갑자기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눈보라가 몰아쳐왔다. 몸이 얼어 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방향이 잡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을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빠지고 엎어지고 뒹굴며 산을 내려왔다.
얼마나 걸었는지 갑자기 눈보라가 멎었다. 시야가 시원스럽게 트였다.
서 있는 곳이 어디이며, 가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이십여년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의 경험이 잊혀지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인생이란 실로 본인의 의사와는 하등의
관계없이 어느 날 내던져 지듯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곳이 어디이며,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모른다. 무엇때문에 태어났고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 길이 없다.
무엇을 해야 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다. 그야말로 뒤를 돌아보아도
망망하고 앞을 내다보아도 망망하다. 겨울 산 눈길의 눈보라 정도가 아니라
태고적부터 덮혀져 있는, 천근 만근되는 어두움의 장막에 갇힌 것 같은 답답함과
망막함이었다.
삶의 현실이 이런 만큼 무엇을 해야 하며,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하고 본능적으로
길을 묻고 찾는 몸짓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는
허무의 심연이요, 슬픔이요, 고통이었다. 이 허허로운 허무의 심연에서 빠져나오고
슬픔과 고통을 근절시키는 길을 찾지 못한다면, 삶은 무의미하고 비극일 뿐이라고 여겨졌다.
인생의 원초적인 허무와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 말고 더 가치 있고 절박한 일은
어디에도 없다고 확신했다.
이와같은 고뇌와 문제의식으로 걸망을 둘러메고 강원에서 선방 또는 이 산중에서 저
산중으로 옮겨다니며 십수년 세월을 지냈다.이때 화엄경을 읽었고 선재동자를 만났다.
짦은 경험이지만 눈보라가 멎고 장막이 걷히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인연으로 화엄경을 좋아하게
되었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때부터 나름대로 불교전체 사상체계를 살펴보았고, 한국불교사상사의
흐름을 짚어 보았으며, 오늘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했다.
- 도법스님의 '길 그리고 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