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병든 문명과 우리 아이들의 미래 / 김종철
병든 문명과 우리 아이들의 미래
김종철 (녹색평론발행인, 前 영남대교수)
하나 : 눈과 귀를 가리는 언론
오늘 여기에는 유치원 선생님들이 모여 계시는데요. 우선 언론에 관한
문제부터 얘기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사회문제에 접근하는 데에는 여러
차원이 있겠지만, 아무래도 언론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아무리 생각이
깊고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도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언론을
통해 전달이 되지 않으면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현대 사회에서 언론의
책임은 실로 막중한 거예요.
돌이켜 보면, 천성이 소극적인 데다가 남 앞에 나서기를 극도로 두려워하는
제가 학교 연구실을 뛰쳐나와 환경잡지를 만들어보겠다고 생각한 동기 중의
하나가 언론에 대해 평소에 가지고 있던 큰 불만 때문이었던 같아요. 불만
정도가 아니라, 이대로 가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다는 느낌이었어요. 그런
느낌에 시달리다가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조그만 잡지라도 하나 시작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게 {녹색평론}의 출발 동기 중의
하나였고, 그 때문에 이런 데에 불려 나오게 되고 그렇게 된 거예요.
어떻든 언론문제가 갈수록 더 심각해지는 것 같아요. 어제 저녁에도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인공 귀, 인공 코 등 이식용 장기들을 쥐와 토끼를
재료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생명공학
분야의 쾌거니 앞으로 대단한 부가가치 창출이 기대되는 일을 해냈느니
하고 칭찬이 자자하더군요. 그리고, 열흘 전쯤에는 전남 영광에서 진도
3.1의 ― 큰 지진은 아니지만 건물이 떨리고 창문이 흔들리는 정도의 ―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지진이 났다는 소식을 전하는 매스컴들이
영광에 원자력발전소가 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아요. 아마 과학기술처
내지는 정부의 관계당국에서 신문사나 방송국에 보도 통제 협조요청을
하였는지 모르지요. 독재권력이 언론기관에 대해서 협박과 회유를 통해서
보도를 선택적으로 하게 하는 것이나, 이런 중대한 환경문제를 단지
비정치적인 문제라고 해서 보도하는 데 자제해 달라고 스스럼없이
부탁하고, 또 거기에 순순히 응하는 것이나 무슨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지
― 따지고 보면 엄청난 재앙의 가능성을 갖고 있는 환경문제에 대해서
언론이 침묵하거나 외면한다는 건 더욱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자동차 문제인데, 저는 자동차야말로 환경의 적 제1호라고
생각합니다. 자동차가 이대로 세상만물을 짓이겨놓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희망이 없어요. 자동차 때문에 망가지는 건 공기와 물과 땅만이
아니에요.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적 삶의 가능성이 자동차 중심
생활로 인해 갈수록 위축되어 가고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나라
언론들이 자동차 문제를 거론하는 수준이란 기껏해야 교통혼잡이나 급발진
문제를 거론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면서 언론들이 스스로 대책이라고 내놓는
게 도로 확충이에요.
전에 미국 상원의원으로 꽤 유명했던 모이니헌이라는 사람의
얘기인데요. 미국의 자동차산업이 번성하면서 미국에서 계속해서
고속도로가 건설되는 과정에서 미국 사람들이 휴양지로 즐겨 찾는
플로리다에 12차선 도로가 뚫리는 것을 보면서, "플로리다에 120차선
도로가 생기더라도 곧 길이 막힐 것이다."라고 했어요. 자동차 문제를 도로
확충으로 해결하려고 해서는 가망이 없다는 얘기예요. 그러나 우리의
언론에서는 정답이 늘 도로 확충입니다.
그런데 신문이나 방송 일을 하는 사람들이 다 돌대가리겠습니까. 꽤 지능이
높은 사람들일 텐데, 조금만 생각하면 이것이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그
사람들도 알 것 아니에요? 그런데도 왜 그러겠습니까. 구조적으로 자동차의
본질적인 해악에 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광고주가
누굽니까.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뉴욕타임즈}에서 오랫동안
일하다가 지금은 한 언더그라운드 페이퍼의 편집장으로 일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뉴욕타임즈}에 있을 때 자동차의 반생태적 문제에 관한
기사를 쓴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사가 나가지도 못하고
편집국장에게 불려갔습니다. "당신이 계속 이런 기사를 쓰면 우리는
망한다. 지엠과 포드와 크라이슬러 회사가 우리에게 광고를 안 줄 뿐만
아니라 소문이 나면 우리는 망한다. 그러니 알아서 해라. 나가든지 쓰지
말든지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뉴욕타임즈}는 세계에서 가장 유력한
정론지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이런 거예요. 우리는 우리나라만
엉망이고 미국은 진정한 민주사회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본질은
똑같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더 심하다고 할 수 있어요.
일일이 예를 열거하기도 힘듭니다만, 언론이 제 아무리 양심적으로 하고
싶더라도 언론은 기업의 손아귀에 갇혀 있고, 또 한국의 경우도 그렇지만
언론 자신이 이미 기업입니다. 인류 전체가 사느냐 죽느냐 하는 이
환경문제, 생태계 파손 문제는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시급히 요구하는
문제이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언론이 이윤 추구에 혈안이
되어 있는 기업의 논리에서 벗어나야 되는데, 지금 이게 안 되고 있는
거예요.
둘 : 지옥으로 이끄는 거대한 비인격적 메커니즘
지금 세계를 지배하는 사람들이 누굽니까. 대통령이나 수상도 아니고
국민이 선출한 국회의원들도 아닙니다. 지난번 가트 협상을 미국이
주도했다고 하잖습니까. 우리 국회의원들은 워낙 그러니까 그렇다고
치더라도, 미국 사람이 쓴 글을 보니까 미국 국회의원들이 가트 협의안을
비준할 때 이 안의 구체적 내용을 제대로 알고 투표한 사람은 10분의 1도
안 된다는 겁니다. 전부 로비에 의해서 이루어진 겁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미국 컬럼바인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 이건 누가 보더라도 명명백백한
일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다른 데에 있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이 무기를
그렇게 자유롭게 구입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미성년자들에게 무기 거래를 규제하는 법안이 통과되는 데 그토록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무기상들의 로비 때문이죠. 가트 협상을 주도한 사람들은
미국 정부의 관리도 아니고, 선출된 공직자들도 아닙니다. 밀실에서 초안
만들고, 일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사람들은 대기업의
이사들이에요. 그러니까, 미국이라는 나라와 나아가서 세계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사람은 미국 대통령이 아닙니다. 클린턴은 다국적기업의 시간제
고용인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이 절대로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코소보에서 사흘에 한 번씩 목표물에서 벗어나는 오폭을
나토군이 하고 있습니다. 중국 대사관을 폭격하고, 멀쩡한 민간인에게
폭격을 가하고, 거의 날마다 그러잖습니까. 유엔을 통하지도
않았어요. 안보리를 거치면 복잡하니까요. 그러니까, 결국 지금 누가 제일
재미보고 있습니까. 무기 자본가들이에요. 그 동안 실험도 못해 본
무기들이었는데, 지금 펑펑 터뜨리고 있으니,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한
방만 터뜨리면 몇 십억이 날아가는 …….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희망이 없습니다. 기업이라는 건 그 자체의 논리가
있어서 도대체 눈 앞의 단기적인 이익 이외에 아무것도 돌볼 수 없게 되어
있어요. 예를 들어, 다국적기업의 경영자들도 자식이나 손자들이 있을
거예요. 아마도 그 사람들은 개인으로 볼 때는 아주 부드럽고 가정적인
사람들일 겁니다. 그 사람들은 비교적 유복한 사람들이니까 남들에게
친절하고 관대하고, 개인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는 사람들일 것인데, 왜
그런 짓을 하느냐 말입니다.
지금 남아메리카에서 한 부족이 몇 백년을 살아온 땅을 빼앗고 쫓아내면서
거기에서 석유 채굴을 하려고 해요. 우와족이라는 그 부족은 오천미터
안데스산맥 벼랑에서 떨어져서 집단 자살을 하겠다고 합니다. 자기들은
정부나 미국 석유회사에서 이주비를 주겠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지요. 왜냐하면 그 땅을 떠나면 삶 자체가 거덜난다는 것이 그
토착부족의 기본인식이기 때문이에요. 그 토착민 부족의 세계관과 자연을
대하는 태도는 이른바 문명사회의 그것과 너무나 판이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땅은 문자 그대로 그들의
어머니입니다. 단순히 논밭 갈아먹는 물질덩어리가 아닙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석유를 캐느라 땅을 파헤치는 것은 당연히 자기 어머니를
유린하는 용서할 수 없는 행위로 비쳐지는 거지요.
우리나라에서도 댐 건설로 정든 고향 땅이 물에 잠기게 되어 정부 보상비를
받아 떠나는 사람들도 못내 감정이 좋질 않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동질적인 문화이고, 땅에서 떠나는 것이 애국이라고 언론에서 떠들고,
자식들도 "어머니, 정리하고 서울로 오세요."라고 그러니까 할 수 없이
떠납니다만 마음의 상처는 굉장합니다. 그런데 이 안데스 부족의 경우는
차원이 다릅니다. 개인주의적인 경쟁의 질서 속에서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모든 숲속의 동식물들과 더불어 한 형제 자매로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더러 갑자기 자본주의 세상, 산업문명 속으로
들어가 살아라 ― 이게 말이 되는 일입니까. 그런데도, 석유회사나 정부는
이해를 못하거나 하지 않으려 합니다. "충분히 돈으로 보상하겠다는데 왜
고집부리고 자살하겠다고 위협하느냐." 하고 되레 답답해 합니다. 그런데
쉘 석유회사는 왜 그런 짓을 할까요. 그 회사의 경영자나 구성원 개개인은
다 좋은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의 기업이라는 조직은
이익을 남겨야 하니까, 그 사람들은 이익을 남기지 않으면 주주들에게
소송을 당하니까, 주주들도 개개인은 좋은 사람인데, 배당금을 받아야
하니까, 제도적으로 강제되어 있어요. 이처럼 세계가 거대한 비인격적인
메커니즘에 의해서 지옥으로 가고 있습니다. 하기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는 지금이 바로 지옥이죠.
셋 : 아이들의 미래를 장담할 수 있는가
어제 {에콜로지스트}라는 영국 잡지를 봤더니 이번 호에 기후문제가
특집이었습니다. 기후 변화가 무섭다는 것은 다 알고 계시겠지만, 실제로
높은 고원지대 기후는 극지방의 기후와 같다고 하는데, 히말라야의 빙산이
무너지고 있고, 안데스산맥 정상의 빙하지대가 지금 거의 다 녹아버리고
없습니다. 남극의 빙벽이 부서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 신문에 여러 번
보도가 되었습니다.
서울 상공에도 오존층이 극히 얇아지고 있다잖습니까. 오후 한 시부터 세
시까지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하는데, 우리는 안 나가도 좋아요. 식물들은
피할 데도 없잖아요. 동남아시아 아열대 지방의 식물들 잎사귀를
현미경으로 보면 폭탄으로 맞은 것처럼 찢겨져 있다고 합니다. 강한
자외선에 쬐였기 때문에 그래요. 농사고 뭐고 이젠 어렵습니다. 중국
상하이가 한 20년 안에 물에 잠길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서울이라고
안전하겠습니까. 전세계적으로 환경난민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전쟁난민이라는 말을 썼는데 지금은 환경난민이라는 말을 씁니다. 물도
없고 더워서 살 수가 없고, 먹을 것이 없고 ……. 참으로 희한한 일은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그래도 아기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엘살바도르는 오랫동안 내전상태였는데 거의 정글지대였어요. 지금은 전
국토가 벗겨지고 15%의 삼림지대만이 남아 있답니다. 독재자로 유명한
아이티라는 섬은 지금부터 4∼50년 전만 하더라도 전 국토가 밀림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벌거벗었다고 해요. 앞으로의 전쟁은 환경전쟁입니다. 지금
중동의 분쟁도 본질은 환경전쟁이라고 규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중동
골란고원에 저수가 되어 있는데 이 물을 이스라엘이 독점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서유럽으로 들어가는 오렌지의 대부분은 이스라엘에서 재배한
겁니다. 그 밑 쪽의 아랍 민족들이 물 달라고 그러지만 이스라엘은 물
없다, 줄 수 없다고 버티는 것에서 문제가 생겨난다는 겁니다. 물론 그
문제만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사람들과의 관계 같은 복잡한 정치적인 문제가
있지만 근본은 환경문제라는 거지요.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기후가 그렇게 결정적으로 나빠지고 있지는 않지만
아열대 기후로 가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나라에도 말라리아 환자가
많아질 겁니다. 세계적으로 전에 없던 질병이 만연하고, 항생제가 말을 안
듣는다는 보고가 속출합니다. 기가 막힌 상황이죠. 그런데 말이에요. 이런
자리에서 누가 이런 소릴 하면 한 번 생각할 뿐이지 이 자리에서 떠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타성을 되풀이해요. 제가 대학 선생 하면서 제일
한심하게 생각하는 것은 지금 세상이 붕괴되고 있는데, 대학교수들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는
거예요. 아무 쓸데없는 것들이지요. 그래도 아프다는 신음소리라도 내야
하잖아요. 지금 우리가 중병에 걸려 있다, 이런 식으로는 정말 죽도 밥도
안된다, 라고 해야 할 것인데 아파하는 것 같지도 않아요.
제게도 이제는 다 자란 아들과 딸이 있습니다만, 그 아이들이 이제 곧
장가가고 시집가야 할 텐데, 저는 걱정이 앞섭니다. 저는 옛날에 그냥
철없이 장가가고, 엉겁결에 아들 딸을 갖게 되었고, 그래서 행복하게
살아왔는데, 저 아이들, 저 아이들의 아이들은 어떤 세상을 볼 것인가,
구체적으로 잡히는 것은 없지만 굉장히 걱정입니다.
넷 : 동물을 학대하면 그만큼 우리의 내면도 황폐해진다
저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예전부터 환경친화적이고 생명친화적인 삶을
살아왔다는 얘기가 잘 믿어지지 않아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프랑스에 유학 갔다 온 사람의 글에서 본 것인데, 어느 해 여름에
프랑스 남쪽 어떤 수도원에서 세계 여러 나라의 대학생들이 모여 캠프를
했답니다. 그 학생들이 수도원의 숲속에 모였는데, 그때 다람쥐가 한 마리
어디서 툭 튀어나왔다고 그래요. 그러자 누군가가 갑자기 그 다람쥐를
향해서 돌을 던졌어요. 한국 학생이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온 학생들은
다람쥐를 보고 다 좋아들 하는데, 한국 학생은 자기도 모르게 돌멩이를
집어들었던 겁니다. 수도원의 수녀가 노발대발해서 "나가라."고,
"앞으로한국 학생들은 받지 않겠다."고 했답니다. 저는 이 얘기를 들으면 한국
사람이면 누구든 뜨끔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실제로 늘
그래왔잖아요.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다람쥐를 돌멩이로 때려
잡기도 어렵지만, 때려 잡아서 어떡하겠다는 거예요? 구워 먹으려고 그러는
걸까요.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에요. 이건 아마 십 년 이십 년 만에 갑자기
생긴 습관이 아닐 겁니다. 사람들은 대개 우리가 가난했기 때문에 그런
버릇이 생겼을 거라는 핑계를 댑니다. 밥 빨리 먹는 것도 가난하기 때문에
붙은 습관이라고 해석합니다. 누가 조사를 해봤는데 세계에서 한국 사람의
식사 속도가 제일 빠르답니다. 평균 8분이라지요. 그런데 과연 모든 게
가난 탓일까요. 깊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
지금 동물 학대는 말도 못할 지경이에요. 도축장에서 돼지나 소들의 장기를
들여다보면 대부분 위와 장에 궤양이 있고, 종양도 많이 발견된다고
그래요. 옛날처럼 돼지나 소들이 여물 먹고 풀 먹고 자연스런 음식을 먹지
못하고 전부 사료를 먹습니다. 우리에 갇혀 지내는 짐승들에게 마지막 남은
재미가 먹는 재미일 텐데, 씹을 게 없는 거예요. 사료라는 건 그냥 넘어가
버립니다. 씹을 게 없으니까 자연히 창자도 쫄아버리고, 거기다가 꼼짝도
못하고 같은 자리에서 먹고, 잠자고, 똥 누고, 오줌 누고 이 모든 것을 다
처리해야 하니, 아무리 소가 순한 동물이라지만 얼마나 신경질이
나겠어요. 사람도 신경질이 나고 불쾌하면 위궤양 걸리듯이 짐승도
마찬가집니다. 이것만 아니에요. 대단위 축산이 참 문제가
많습니다. 대단위 축산 하면 그냥 사람의 입장에서 배설물, 폐수 문제만
생각하는데, 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소가 신경질이 나고
정신이 불안해 하니까 사료 속에 신경안정제 넣죠, 빨리 크라고 성장호르몬
넣죠, 갇혀 지내니 병에 대한 저항력이 약해지니까 항생제 넣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런 일도 있다고 해요. 원래 소는 되새김질
동물이잖아요. 소의 위장에 풀이나 여물 같은 조섬유가 들어가야
되새김질이 가능한데, 축산 과학자들 생각으로는 그러한 조섬유로 된
먹이로써는 획기적으로 우유 생산을 늘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또 잔꾀를 부린 거죠. 플라스틱 수세미를 소한테 억지로 삼키게 하여
그것이 조섬유가 하는 기능을 대신하게 하자는 겁니다. 플라스틱 수세미는
소화가 되지 않으니까 소의 위에 잔류하면서 위벽을 자극하게 되니까
종전처럼 많은 조섬유 먹이가 필요 없고, 그 대신 단백질 함량이 많은
곡물을 소에게 주는 겁니다. 그러면 하루 1갤런 나오던 우유가 5갤런,
7갤런으로 증산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런 경우에 소라는 짐승은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니라 그냥 우유 생산 기계일 뿐이에요. 동물 학대도
보통 학대가 아니죠. 이런 게 현대 과학기술이 밤낮 없이 되풀이하는
일이에요.
또, 소들이 들에 나가지 못하고 축사에 갇혀 지내니까 모기, 파리들이
들끓잖아요. 그래서 소가 꼬리를 들어 모기, 파리떼를 쫓는데,
축산업자들은 그런 움직임 때문에 소의 몸무게가 불어나가는 속도에 지장이
생긴다고 생각해서 그걸 막으려고 소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잔뜩 살충제를
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온 축사가 안개처럼 살충제로 뒤덮여버려요. 그
독한 살충제 안개 속에서 소들은 피할 데도 없고 꼼짝없이 당하는
거지요. 거기다가 운동을 못하니까 뼈는 약해질 대로 약해지고, 그래서
도살장으로 실려 가는 도중에 트럭 위에서 다리뼈가 부러지는 소가
속출하는 거예요. 그렇게 쓰러져도 마취약이나 진통제를 주지도 않고, 당장
죽이지도 않아요. 서부 영화에서 보면 말이 부상을 당하면 총을 쏴서
죽여줍니다. 그런데 소한테는 그런 짓도 하지 않습니다. 살충제, 진통제
주면 고기 맛이 떨어진다고 그냥 도축장에서 데리고 가서 차례대로
죽입니다. 그 지옥 같은 단말마의 비명을 그대로 방치합니다. 그런데 그런
잔혹한 방법으로 사육해서, 그렇게 죽인 소의 고기를 포장해서 슈퍼마켓의
붉은 불빛 아래 두면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냥 신선한 고기인 줄 알지요.
그런데 그런 고기를 먹은 사람의 몸과 마음이 편안해질까요? 어떤
생물학자는 고기의 질은 그 가축이 어떤 식으로 길러지고, 보살핌을
받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아야 한다고 했는데 저는 그게 정말 깊은
통찰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유물론적인 사고에 길들여져서 그저 열량이나
영양분 같은 것만 가지고 따지는데, 소가 인간에게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가
이것이 궁극적으로 고기의 맛과 질도 결정한다는 겁니다. 옛날 어진
사람들은 화가 났을 때는 식구들을 위해 요리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화가 났을 때는 사기(邪氣)가 음식에 들어가서 그걸 먹은
식구들을 해친다는 겁니다. 이것이 언젠가는 과학적으로 증명될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동물들을 이렇게 대해 가지고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온갖
동식물들과 땅과 우리는 내면의 깊은 심층에서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동물들이 학대받으면 받는 만큼 우리 자신도 모르게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는 우리 자신도 상처를 받게 되는 겁니다.
다섯 :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참 존경스럽습니다. 저는 대학에서나 겨우 선생
노릇을 할 수 있을까, 중· 고등학교나 초등학교에서는 가르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단순한 지식 전달을 위주로 하는 교육은 어떻게 해보겠는데,
감성교육, 정서적인 교육은 자신이 없습니다. 저 자신이 문제가 많기
때문이죠. 오늘 하고 싶은 얘기도 실은 저 자신에 관한 얘깁니다.
몇 해 전에 서울 YMCA의 한 교사모임에서 생태교육에 관해서 얘기를 해
달라고 해서 한 시간 동안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교사들이 앉아
듣기에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생태교육을 할 것인가."는 말하지 않고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 이런 하나마나한 말을 한다고
생각한 거지요. 어떤 선생님이 유감을 표시합디다. "오늘 별로 배운 게
없는 것 같다."고요. 그런 말을 들으니 오기가 생기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겠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노하우만
알면 된다는 말인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기술만 알면 된다는 것인가. 여기
앉아 계신 선생님들과 나는 이만하면 됐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말인가." 그때서야 분위기가 조금 무거워지더군요.
오늘도 그런 얘기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전부 어른들 책임이죠. 그런데 어른들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어요. 저는 오래 전에는 어리석게도 세계의 환경문제에 대해서는 미국
대통령 같은 사람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어떻든 해결을 시도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나 같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공연히 헛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요. 우리 집사람 얘기가 오래 전부터 제가 쓸데
없는 걱정을 많이 했다는 거예요. 비가 오면 "아스팔트 밑으로 빗물이
어떻게 들어가나, 저 밑에 흙이 어떻게 숨을 쉴 수 있나." 이런 소리만
하고, {다가오는 새로운 중세} 같은 이상한 책을 보면서 고민만 하고,
여하튼 걱정이 많았답니다. 이런 걱정을 안 할 수 없었던 게 1960년대
경제개발이 시작되고 난 직후부터 우리의 삶이란 것은 모든 개인, 모든
조직, 모든 기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전부 자기 확장을 위해
발버둥치는 것으로 일관하는 과정이었단 말입니다. 이곳 부산대학은 옛날
대학시절에 한 번 와본 적이 있는데 그땐 벌판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학교 안팎이 온통 빽빽해졌어요. 부산대학만 이러면 좋은데 온 나라가 다
이렇습니다. 제가 있는 영남대학만 하더라도 제가 처음 왔던 20년 전에는
학교와 시 외곽 사이가 전부 논밭이었습니다. 차를 타고 가면 탁 트여 막힐
게 없었어요. 그때 우리는 스쿨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그 버스를 페리라고
그랬어요. 마치 대한해협을 건너다니는 기분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게
20년 동안 완전히 변해버렸습니다. 서울과 인천 사이처럼 붙어버린
겁니다. 20년 동안 저는 매일 그 망가지는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우리가
옛날 교과서에서 배운 곡창지대, 평야라는 것만 해도 이제 온전하게 남은
게 없어요. 김해평야가 얼마나 넓은 곳이었습니까. 그 김해평야가 형편없이
파괴되어, 이제는 거기서 나오는 생산물로 김해시 인구도 먹여 살리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식량 자급률이 25%밖에 안 되는 건 여러분들도 다
아시겠지요.
전부가 다 이렇습니다. 개인은 개인대로, 조직은 조직대로, 끊임없이 더
커지려고 몸부림이에요. 그걸 발전이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한국사람만
이러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단순히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끊임없이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지 않으면 망하게 된다고 다들 생각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구가 고무줄이 아닌데 어떻게 이 끝없는 팽창이
계속될 수 있을까, 이런 추세로 가다가 나중에 어떻게 될까." 하는 것이 늘
고민이 안 될 수 없었어요.
쓰레기 문제도 풀릴 수 없는 고민거리예요. 끊임없이 나오는 쓰레기를
태운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파묻을 수도 없는 거란
말입니다. 언론에서는 별 생각도 없이 합법매립, 불법매립 운운 하지만, 이
경우에 합법, 불법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지구라는
유한체계의 한정된 공간 안에 어떻게 매립해야 합법매립이 된다는
거예요. 완전히 말장난이죠.
그런데도, 저는 참으로 어리석게도 "나보다 힘있고 머리 좋은 사람들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느냐, 우리나라 대통령이 못하면 미국 대통령이 알아서
하겠지."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게 아니더군요. 미국
부통령인 엘 고어라는 사람은 환경문제에 관해 꽤 식견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부통령이 되기 전에 {위기에 처한 지구}라는 책도
냈습니다. 아주 엄청나게 좋은 말들이 수도 없이 나오는 책입니다. "인간이
영성적으로 깨달아야 한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 그 책의
결론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부통령이 된 다음 미국의 환경정책이
어떻게 달라졌어요? 오히려 악화되기만 했단 말이에요. 엘 고어는 지금
인터넷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다음 세기 미국의 국가 경쟁력을 위해서 정보
고속도로 사업을 본격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엘 고어의 현재 주된
관심사입니다.
여섯 : 목적지가 어딘가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어요. 어린 아이들에게는 환경문제에 관해서
함부로 얘기해서도 안 될 거예요. 정말 예민한 아이들은 굉장히
혼란스러워질 겁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특별히 예민한 편도 아닌데,
중학교 다닐 때 엄마 아빠가 밥상에서 이런 문제에 관해 얘기를 하니까
걱정이 되는지, "우리는 어떻게 해야 돼?" 하고 묻더군요. 제가 무슨
말을합니까. 저는 아이들에게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있어서
"모르겠다, 맛있는 거나 많이 먹자." 그랬어요.
제가 보기엔 요즘 아이들이 참 안쓰러워요. 근원적인 차원에서 미래
세대에게는 희망이라는 게 없단 말이에요.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다가도
한심한 생각도 들고, 학생들이 측은해 보이기도 해서 가끔 엉뚱한 질문을
해요. 너희들 목적지가 어디냐? 대기업에 취직하는 게 목적이냐? 그
다음에는? 장가가고 시집가는 거냐?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제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느냐 하면 이 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하자 마자 취직공부,
고시공부에 매달려 있어요. 법학과, 경제과, 영문과 이런 과가 상관이
없어요. 다 똑 같아요. 눈부시도록 환장할 것처럼 좋은 날씨에, 캠퍼스가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도 궁상맞게 문제집 풀고 앉아 있단
말이에요. 목적지 같은 거 있을 수 없는데도 말입니다.
애들 키우는 것도 그렇습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위해서,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들어가기 위해서 늘 닦달이에요. 언제나
'준비과정'입니다. 살아 있는 순간 하나 하나가 그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매일 매일이 단지 그 다음날을 위해서 존재하는 준비과정일
뿐입니다. "너 이러면 나중에 어떻게 되겠느냐, 대학 들어가겠느냐, 좋은
사람 되겠느냐." 지금 삶은 삶이 아니라는 거죠. 그런데 지금 여기의 삶을
떠나서 삶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삶이란 오로지 다가올
어떤 날이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할 뿐입니다. 오늘날 산업사회에서
교육이나 삶의 가장 큰 문제는 시간의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저기까지
직선을 그어 놓고 목적지를 향해 가는 단계로서만 삶을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과정의 마지막은 결국 무엇입니까. 이에
반해서 전통사회는 직선이 아니라 원형의 사이클을 그렸습니다. 작년에
우연히 미국 잡지 {뉴스위크}를 보니까 일본의 불황에 대한 기사가 나와
있더군요. 일본은 10년 넘게 장기적인 불황입니다. 실업자도 늘어나고
은행도 망하고 하는데, 미국 기자가 일본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하는 얘기가
"이런 불황이지만 한 가지 좋은 점은 일본의 월급쟁이들이 경제성장 기간
동안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오로지 회사인간으로만
살아왔는데, 이 사람들이 지금 갑자기 시간이 많아져서 몇십 년 만에
처음으로 비 오는 구경을 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창 밖에 비 내리는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하고, 옛날처럼 꽃구경을 하기도 한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직선적인 시간에서 순환적인 시간의 삶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단순한 보도기사가 아니라 굉장히 철학적인
얘기예요. 결국 지금 우리가 순환적인 시간을 되찾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건 틀림없어요.
일곱 : 병든 문명 자체가 문제의 핵심이다
갈수록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어른들에게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게 아니냐 하는 겁니다. 어떻게든 지옥으로 가는 기차의 브레이크를
걸어야겠지만, 어른들은 이미 심리적으로 다시 태어나기 어렵게 되어
있어요. 아주 예외적인 사람들을 빼고는 말입니다. 모든 일이 자연스러워야
하는데, 문제는 우리 사회나 미국 사회 할 것 없이 산업사회의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고 편하지 못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다 아시는 대로 세 살 때까지가 인생의 거의 전부를 결정한다고
하잖아요. 그 시기의 정서적인 원만함, 잠재된 인간성이 풍부하게
길러지느냐가 나머지 일생을 대부분 결정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유아교육,
가정교육, 그리고 어머니의 역할이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거지요. 결국
이것은 우리가 어떤 문화에서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 결정적인 관건이라는
얘기가 됩니다.
남미 인디언 부족의 양육과정을 지켜보았던 미국의 어떤 여성학자의 말이,
미국 사람들은 아이들을 태어났을 때부터 독립심을 길러준다는 명목으로
부모들과 분리시키고, 그래서 심리적으로 고독하게,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오늘날 미국 문화의 핵심적인 문제라고 합니다.
컬럼바인 고등학교의 총기 사건을 놓고 봅시다. 미국에서 지난 2년 동안에
여덟 번이나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상투적으로
나오는 진단이 결손가정의 문라고 하는데, 컬럼바인 사건 때 친구들을 쏴
죽이고 자신도 자살한 그 아이만 놓고 보더라도 아주 유복한
가정환경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어떤 가정보다 부모와 대화를 많이 나누는
집안의 아이였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중산층 가운데 꽤 잘 사는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병이 있건 없건 정신과 의사를 만나는데, 어떤 정신과 의사의
고객이냐 하는 게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말해 줍니다. 그런데 그 사고가
나기 두 달 전에 그 아이의 식구 전부가 정신과 의사와 상담한 기록이
있는데, 이 아이를 포함해서 그 가족의 정신건강은 완전히 정상적이라고
진단, 기록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결국 병든 문명 그 자체를
떠나서는 설명이 안 되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총기 사건이 없다고 안심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왕따' 문제가 있잖습니까. 우리는 대개 피해를 당한
아이만 주목하는데, 실제로 희생자는 가해자 자신이라고 할 수
있어요. 피해 당하는 아이들은 물론 괴롭겠지만, 진짜 마음이 지옥인
아이들이 누구겠습니까. 가해 측 아이들입니다. 그 아이들을 결손가정의
문제로만 설명할 수 없습니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오늘날
결손가정 아닌 집안이 정말 있을까요? 정신병자 아닌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이 모든 것이 우리가 공동체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생겨난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인류가 만든 가장 나쁜 제도 중의 하나가
핵가족제도입니다. 아이들이 태어나서 병든 문명 속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그런 부모와 주로 교섭하는 한,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이 원활할 수가
없습니다. {오래된 미래}에 나오는 라다크 사람들은 참 표정이 좋고, 욕을
하지 않고, 화를 내지 않고, 품성들이 아주 존경할 만합니다. 인디언
부족들도 그렇습니다. 로렌스 반 데어 포스트라고 아프리카의 부시맨과
오랫동안 같이 지낸 영국 작가에 의하면, 새카맣고 조그만 그
토착민들이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기품이 넘치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남들에 대한 배려가 깊고, 자존심이
강하고, 성실하고, 예민하다는 겁니다. 그들은 공동체 속에서 대가족
단위로 살아가고 있어요. 공동체 속에서는 답답할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은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몸에 밴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지금 제가 볼 때는
말이지요, 우리 아이들이 이런 식으로 자라나서는 아마 전부 폭력배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도대체 인간의 품성을 도야하는 방향과는 너무도 어긋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단 말이에요. 지금 이 나라에서는 두 사람 중의 한 아이가
제왕절개로 태어나고, 초음파 검사를 통해서 성별검사를 하고 나올지 말지
마음대로 결정하고 있어요. 하긴 기형아 출생에 대한 두려움이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에요. 온갖 독성물질이 널려 있는데다가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거기다가 엄마젖을 먹는 아이가 겨우 5%라고
해요. 오히려 미국에서 75%, 유럽에서는 90%가 모유를 먹인다고 하잖아요.
더욱이 교육이란 것도 모조리 남들과 배타적으로 경쟁하는 기술을 가르치는
일이에요. 유치원에서 왜 글을 가르치는지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요. 사람들이 대개 교육이라고 하면 글부터 가르치는 것이 교육인 줄
알고 있는데, 그건 가장 나쁜 교육입니다. 왜 구구단을 초등학교에서
강제적으로 외우게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부모 따라
잠시 미국 생활을 하면서 그곳 초등학교를 다녔는데요. 외우는 훈련을
여기서부터 받아서 그랬는지 그 반에서 미국 국가를 외우는 유일한 학생이
되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사정도 모르고 칭찬을 했지만, 나는 굉장히
부끄러웠어요. 얼마나 수치스러워요. 우리나라 아이들이 외우는 일에는
도사지만, 그런데 내면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잖아요. 발도로프
학교에서는 저학년 아이들에게 지식교육을 하는 건 독약을 주는 것과
같다고 하는데, 그런 책임 있는 태도가 정말 부러워요.
여덟 : 새로운 삶이란 상상력의 문제이다
부모가 같이 있지 않아서 정서적인 교육을 하기 힘들다고 하지만 요즘
아이들과 부모들이 같이 있다고 해도 텔레비전 보는 일이
전부입니다. 지금은 군대를 파견하는 식으로 남의 땅을 침략하고, 식민지로
거느릴 필요도 없는 시대입니다. 가난한 나라에 텔레비전만 보급해 주면
그걸로 사실상의 식민지가 되는 겁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좋으냐
나쁘냐 그것 가지고 흔히 왈가왈부하지만, 그건 부차적인
문젭니다. 텔레비전 화면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폭력적인 장면도 문제지만,
무엇보다도 뭔가 물건을 사야 행복해진다는 메시지를 어릴 때부터 계속해서
하루 너댓 시간씩 주입시켜 놓으면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수동적인
상품소비자로서의 일생을 군말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거기다가
도처에서 끊임없이 컴퓨터, 전자오락 게임이 주는 유혹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즉자적이고 충동적인 인간으로 자라나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요.
아이들에게 무조건 텔레비전을 보지 말라고 해서는 아무 효과가
없어요. 그런 졸렬한 방법 말고 미국의 한 마을에서 이런 실험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운동이 왜 없는지 모르겠는데요. 미국의 한
작은 소읍에서 한 사람의 교사가 발의를 해서 시작된 실험이었는데요, 그
교사의 문제의식은 텔레비전 때문에 아이들의 상상력이 고갈되고 있다는
거였어요. 실제로 이것은 우리가 쉽게 느낄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해요. 밤늦게 텔레비전을 보다가 자려고 누우면 아까 봤던 연속극
<은실이>가 자꾸 눈 앞에서 어른거리잖아요. 하여튼 텔레비전은 우리의
상상하는 능력을 제약하는 게 틀림없어요. 성장기의 아이들에게는 이런
문제가 더욱 심각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교사는 부모들과
의논을 하여 한 열흘쯤 텔레비전을 보지 않고 지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못보도록 강요할 수는 없으니까 세 가지 대안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게 하였습니다. 첫째는 전과 같이 그대로 텔레비전을
보는 그룹, 둘째는 텔레비전 대신 라디오를 듣는 그룹, 셋째는 라디오든
텔레비전이든 아무것도 보지 않고 지내는 그룹으로 나누었어요. 그리고는
정해진 기간 동안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아이들을 위해서 동네의 적당한
곳에서 음악회도 열고, 늙은 아저씨들이 옛날 이야기도 들려주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했다고 해요. 그렇게 해서 정해진 기간이 지난 다음 조사를
해보았더니 재미난 대답들이 나왔어요. 그 가운데서도 제일 재미난 답변은
라디오만 들었던 아이들에게서 나왔습니다. 텔레비전 시대에 지금까지
라디오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아이들이 열흘 동안 저녁마다 라디오를
듣고는 그걸 굉장히 즐겼다는 거예요. "라디오가 텔레비전보다 그림이 더
좋던데요." 하는 게 그 아이들의 대답이었어요. 다시 말해서, 라디오를
들으면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상상을 즐길 수 있었다는 겁니다.
저도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우리 집에 일제 소니
라디오가 처음 생겼는데, 그건 굉장한 일이었어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그렇게 듣기 좋았고, 라디오 드라마를 듣는 건 정말
행복한 경험이었어요. 저는 야구 경기도 실지로 운동장에서 구경하는
것보다는 라디오를 통해 중계방송 듣는 게 더 재미가 있었어요. 혼자
상상하는 재미가 그렇게 큰 거예요.
텔레비전이 없어야 상상력이라는 것이 이렇게 발휘되는 거예요. 여기서
뭔가 나오는 겁니다. 상상력이란 게 별다른 게 아닙니다. 지금 주어진
테두리를 넘어서는 다른 대안을 구상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런 식으로 아이들을 길러서는 새로운 사회로 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사회를 그릴 수 있는 능력을 아이들에게서 박탈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아이들의 마음은 텔레비전이 암시하는 세계상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문헌을 보니까 독일 튀빙겐대학의 심리학팀이 청소년들의
지각 능력, 감각 능력의 변화를 20년 동안 추적한 결과가 나와
있었는데요. 지난 20년이라는 것은 우리 인류사에서 가장 급격한 환경
변화가 일어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보고의 요지는 지난 20년 동안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지각 능력이 연평균 1%, 말하자면 20년 동안 20%가
퇴화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붉은 색 계통의 색 가운데서 예전에는 수십 가지
색의 차이를 섬세하게 알아보았다면 지금은 시뻘건 색이 아니면 붉은
색으로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청각도 마찬가집니다. 고함을
치지 않으면 대뇌를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뇌간에 망상구조라는
게 있다지요. 그걸 뚫고 들어가야 소리가 인지된다고 하는데, 작은 소리는
오늘의 청소년들의 그 망상구조를 통과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환경이
나빠지고, 소음이 심해지면서, 지각능력이 무디어진다는 것은 결국 사람이
섬세한 감각을 잃어버리고 성격도 거칠어진다는 뜻이겠지요. 아닌게 아니라
요즘 섬세한 느낌을 가진 사람다운 사람들이 점점 드물어지는 게
사실입니다.
아홉 : 휴대폰의 뻔뻔스러움
휴대폰을 봅시다. 휴대폰 가진 사람들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겁니다. 휴대폰은 그 전자파로 인해 뇌종양을 일으킨다는 얘기도 있지만,
기억력을 손상시킨다는 무시할 수 없는 증거도 있어요. 몇 달 전 영국
통신회사에서 5년 간 근무했던 사람이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일이
있었습니다. 매일 5∼6시간 동안 규칙적으로 휴대폰을 사용치 않으면 안
되는 직책에 종사했던 사람이 5년 근무 끝에 기억상실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밥 먹으러 와서는 뭐 하러 왔는지를 잊어버린다는 거예요. 그래서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는 기사가 영국 신문 {가디언}에
나왔어요. 꽤 중요한 뉴스라서 국내신문에서도 보도가 될 줄 알았는데,
우리나라 신문에서는 볼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휴대폰의 문제는 이런
건강상의 문제만으로 그치는 게 아니죠. 직관적으로도 느낄 수 있고,
조사를 해 보면 결국 검증될 문제이겠지만 휴대폰은 인간 자신의 내면과
사회적 관계를 크게 손상시키는 게 틀림없어요. 저는 생명공학에 관심이
굉장히 많은데, 그 이유는 생태계 파괴라든지, 유전자 조작 식품이 건강에
미치는 유해작용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국 그런
생명조작 기술로 전통적인 인간 개념이 걷잡을 수 없이 왜곡될 위험이 크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 남의 감정을 섬세하게 배려하고,
예의를 차리는 태도 등 사람 사이의 기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근본적인 자질이 파괴될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그런데 휴대폰 때문에
사람들이 그 비슷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전통적으로 우리는 낯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우적우적 씹는 일을
하지 못했어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조금 은밀한 분위기가 필요한
제사행위 같은 것으로 오랫동안 생각되어 왔는지 모르지요. 하여튼 그러한
전통이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또, 요즘은 포장식 이사가 유행이어서 좀
달라졌지만, 상당히 최근까지만 해도 이사 한번 가려면 짐차 위에 자기
집의 온갖 세간을 다 노출시킨 채 다녀야 했습니다. 저는 이사를 많이 다닌
편인데, 그 때마다 우리 집 물건을 세상에 다 공개하는 셈이니까 그게
그렇게 거북하고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좀 예민한 편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런 느낌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요즘
휴대폰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요란하게 울리고 있어요. 거리에서도
걸어가면서 전화를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통화행위를 통해서
사생활이 노출된다는 점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고, 거리를 지나가는 다른
행인들의 존재에 대해서 완전히 무시하는 듯한 태도로 행동하고 있는데,
이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감수성이란 말이에요. 기계 좋아하다가
모두들 영혼이 없는 기계 인간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닌지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열 : 현재의 문제에서 대안을 찾자
미국의 '아미쉬'라는 공동체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마차 타고 다니면서, 텔레비전도 전화도 멀리하고
주로 전통적인 방식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있는 특이한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오래 전에 유럽에서 미국으로
왔습니다. 종교개혁 운동과정에서 나온 재침례파라는 종교집단인데, 무기를
들지 말라는 그들의 지도자의 가르침에 충실하였기 때문에 유럽에서
끊임없이 정치적 박해를 당하다가 미국으로 건너왔던 것입니다. 그들은
단순소박한 삶이야말로 복음서의 정신으로 사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현대 산업사회의 중심인 미국 땅에 살면서도 이른바 문명의 이기를
멀리하고, 또 아이들을 현대식 미국 학교에 보내지도 않아요. 자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법적 권리를 따내기 위해 몇십
년간이나 투쟁한 결과 1970년대 초에 연방대법원의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수 있는 문자 해득력과 덧셈 뺄셈을 할 수 있는
능력만 갖추면 된다는 겁니다. 그 이상의 지식은 사람 생활을 타락시킨다는
생각이지요. 그렇다고 이 공동체가 엄격한 가부장제의 억압적 질서로
유지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미쉬 아이들이 일정한 연령에 이르게 되면
공동체 속에서 계속 살 것인지 미국의 주류사회로 나갈 것인지 스스로
택하게 한다는 것인데, 아이들 중 나가서 살기를 원하는 비율은 10%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가서 살게 된 젊은이들도 대개는
나중에 대학 등을 졸업하고 나서는 미국 주류사회에 아미쉬 문화를
소개하는 일을 한다고 해요. 그러니까 굉장히 성공적인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제일 조용한 데가 아미쉬 사람들이 사는 공동체라고 해요. 그들의
밀밭에서는 향기가 나고 벌이 윙윙거리고 나비와 잠자리들이 수없이
날아다닌다고 합니다. 요즘 전부 화학물질과 기계로 농사를 지으니까
농촌이라고 가봐야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건 한국이고 미국이고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아미쉬 사람들의 삶은 지극히 평화롭습니다. 텔레비전 안
보고 기계에 매달리지 않으니까 시간이 많습니다. 이 공동체에는 따로 교회
건물도 없고,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예배를 보고, 건물을 짓는 일도 모여서
공동으로 합니다. 그러니 노동도 잔치가 되는 겁니다. 원칙적으로 기계
사용을 거부하지만, 무조건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식 기술도 공동체의
삶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면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의 주된
교통수단인 마차에도 내부는 현대적 기술이 어느 정도 적용되어 있고,
부엌도 편리하게 설계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현대 기술이나 기계를
대하는 태도는 참 지혜로워요. 예를 들어, 전화를 집에 둘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오래 토론한 끝에 내린 결론이 그렇습니다. 전화가 집집마다
들어오면 가족생활과 공동체가 큰 손상을 입을 가능성이 있고, 그렇다고
전화의 좋은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 그 사람들은 결국 동네마다 한 대씩
공중전화를 두기로 결정을 한 겁니다. 현대적 기술이라면 무비판적으로
덮어놓고 받아들이고, 그 결과 사람살이의 토대가 치명적으로 망가지고
있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어리석은 사회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해요.
지금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플레인}이라는 잡지가 나오고 있는데, 저도 그
잡지를 받아보고 있습니다. 독자가 아마 몇천 명 될 겁니다. 종이도
{녹색평론}보다 더 고약한 종이를 쓰고, 한 동안 컴퓨터로 제작을 하다가
지금은 옛날 인쇄기, 한 장 한 장 찍어서 하는 구식 인쇄기로 박아내는
잡지예요. 이 잡지를 내고 있는 스코트 세비지라는 사람은 원래 도시에서
시립도서관 사서 일을 하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서른 여덟 살 때에 자기
삶에 변화가 있어야 하겠다고 결심을 했어요. 자기의 삶이 재미가 없기도
하고, 아이들을 위해서도 안 되겠다 싶어서 그 부부는 처음에 텔레비전,
전화기, 냉장고를 포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고 얼마 동안 지내다가
결국에는 아예 도시를 떠나서 아미쉬 공동체 인근 마을로, 그러니까 시골로
이사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자기와 이웃 사람들이 사는 얘기를 써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거기에 호응하는 사람이 많아지니까 얼마 안
되어 수천 명이 넘는 독자가 읽는 잡지가 되었습니다. 산업문명이 벼랑
끝에 다다른 상황에서 미국이라는 사회에서도 주류문화를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대안학교운동이 꽤 활발한 듯 한데, 이런 꿈을 꾸는
사람들이 예전에 비해서 많이 나타나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혼자의
결단으로 시골로 간다든지, 텔레비전을 없애고 자동차를 버린다든지 하는
것은 결국 건강한 문화에 대한 갈망을 드러내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노력도 좋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주류문화 전체에 근본적인 방향 전환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제가 가장 뼈아프게 느끼는 것은 학생수가 모자란다고
해서 자꾸 시골학교를 폐쇄하는 교육부 정책입니다. 시골학교가 어떤
학교입니까. 마을 사람들이 자기들 힘으로 만든 학교입니다. 마을의 땅을
기증해서 손수 지은 학교입니다. 역사도 오래되어 보통 수십 년이 넘고, 백
년이 가까운 학교도 있습니다. 마을에서 심리적인 중심 노릇을 하는 게
학교입니다. 또 학교의 느티나무들은 얼마나 좋습니까. 학교가 폐쇄되면
결국 이 나라 농촌 공동체는 괴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류가 지금 닥친 이
위기를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지속가능한 순환형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고,
순환형 사회는 농촌 공동체의 회복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진리예요. 그런데 학생이 백 명이 안 된다고 시골학교의 문을
닫아버립니다. 경제논리 하나로 말이죠. 이해찬 장관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하는 말이, 학생이 적으면 교육이 부실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어떻게 한
선생님이 여러 학년에 걸친 아이들을 다 가르칠 수 있느냐, 말이 안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교육부 관리들은 지식교육이 교육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지식교육은 교육 가운데서 극히 일부분이고, 특히 성장기의
아이들에게는 가장 하찮은 의미를 가지는 것인데도 말이에요. 그리고
지식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초등학교 과정에 무슨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합니까. 학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 옆에 있는 것만으로 훌륭한
교육입니다. 거기다가 나이가 같은 또래들만이 아니라 여러 연령층으로
다양한 아이들이 섞여 있을 때 가장 인간적인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하잖아요. 또래집단만의 교실에서는 경쟁심만 자극하게 마련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아이들이 적은 시골학교는 문을 닫을 게 아니라 마을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모시고 아이들과 함께 지내게 하면 아이들이 자라는
최고의 환경이 되지 않겠어요? 역사적으로 볼 때도 이런 환경 속에서
아이들이 자라나야 심성이 원만하고 평화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게
틀림없어요. 인류의 경험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장 나쁜 방법을
제일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선택하고 있습니다.
교육에 관계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참 문제인 것 같아요. 한국 교사들이
해외연수를 갔다가 독일의 어느 발도르프 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는
모양이에요. 한국의 학교에는 교실마다 텔레비전이니 컴퓨터니 하는 것들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 학교에는 그런 것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한국 교사들
가운데 어떤 교사가 "뭐 이렇게 뒤처진 학교가 있느냐." 하고 말하더라는
거예요. 그냥 돈이나 많이 들고 화려한 전자제품이 즐비하면 교육도 저절로
된다는 사고방식에 젖은 사람의 발언이지요. 지금 성장기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현장에서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따위가 끼치는 유해작용은
심각한 것이지만, 제가 볼 때 제일 위험한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 교육이 안고 있는 진정한 문제점을 망각하고 모든 문제가 기계나
기술로 자동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저는 거창한 대안을 생각하기 이전에 현재 우리가 당면한
이런 터무니없는 잘못된 통념들과 싸우는 일이 실제로 가장 긴급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열 하나 : 아이들의 먹거리 하나라도 깊이 고민해 보자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 개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제한되어
있습니다. 공동으로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하다못해 학교급식, 혹은 유치원 급식문제, 먹거리의
문제에서도 같이 할 수 있는 일을 한 번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는 농민들과 결합하는 문제, 그래야만 아까 말씀드린 동물 학대도
근본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습니다. 경제논리, 상업논리를 위주로 사니까
동물 학대도 하고, 농작물에 아무렇지 않게 독성물질을 퍼부어 넣는 일이
생겨납니다. 서로 아는 사이라면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한살림운동'에 관해서 중산층운동이 아니냐, 여유 있는
사람들이 이기적인 욕심에서 제 식구들 깨끗한 음식 먹이려고 하는 운동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얘기를 들으면 사람 마음이
어떻게 저렇게 각박할 수 있을까 하고 서글퍼져요. 물론 이기적인 욕심으로
'한살림'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자기 가족에게 좋고
깨끗한 것을 먹이겠다는 그 욕망이 나쁜 겁니까? 그렇게 해서 그것이
사회화되어서 사람도 살리고 땅도 살리고 하늘도 살리는 실마리가 된다면
그것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그냥 앉아서 욕만 하면 뭐합니까.
서울에 있는 '한살림' 주부들과 얘기하면서 느낀 겁니다만, 주부들이나
아이들의 교육에 관심이 있거나 직접 관계하는 사람들만이라도 아이들 입에
들어갈 음식물 문제에 대해서라도 철저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면 우리 삶이
참으로 엄청나게 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 아이들의 음식물과
관련해서 몸의 건강도 문제지만 정신적, 심리적인 건강 면에서도
독성물질이 계속 들어가면 결코 좋을 리가 없습니다. 간디 같은 분은 한창
수행할 때는 우유 한 잔만 먹어도 정신이 혼란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음식이 우리의 몸을 만들지만 동시에 우리의 영혼을
만듭니다. 아까 '왕따' 얘기도 했지만 요즘 아이들의 성격이 더
조급해지고, 공격적으로 되어 가는 것은 음식물과도 큰 관련이 있을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아이들이 독극물을 일상적으로 먹고
있잖아요. 아이들이 좋아하는 식품은 거의 전부 불량식품이에요. 피자며
햄버거며 하는 것들에 들어 있는 고기에는 성장호르몬도 들어 있단
말이에요. 먹는 것이 거의 그렇습니다. 어쩌면 이런 것을 방치하고 있는
부모들은 참된 부모가 아니라 아이들의 원수인지도 모릅니다. 전생에 무슨
고약한 인연이 있어서 만난 사이인지도 모르지요. 대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말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무슨 노력은 해봐야 할 것
아닙니까. 공연히 남 탓하고 있을 것이 아닙니다. 정부가 절대로 해 주지
않습니다. 언론이 절대로 도와주지 않을 거예요. 꼭 '한살림'이 아니더라도
근본 취지가 그와 비슷한 운동이 사회 저변에서 크게 일어날 필요가 있다고
저는 봅니다. 요즘 분위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대로 가서는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열 둘 : 언론의 쇄신을 위해 직접 행동하자
또 하나는 서두에서도 꺼냈지만 언론에 대해서 우리가 챙겨야 합니다. 그냥
보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언론에 대해서 독자 의견란을 증가시키라는
요구를 해야 합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과 비교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앉아서 쑥덕거리기만 하고 이를 사회화시키지 않는다는
겁니다. 지금 지식인들도 사석에서는 저보다 환경문제에 대해서 더
걱정합니다. 그렇지만 공식석상에서는 세계자본주의 체제, 통일 얘기,
동북아 정세 얘기나 하지 음식 얘기 이런 것은 거의 하지 않아요. 이런
얘기는 체면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끼는 거지요. 이러한 권위주의 의식이
우리 사회의 진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입니다.
저도 잡지를 하니까 잘 알지만, 독자편지가 없습니다. 작년에 대구에서
열린 전국 독자모임에서 제가 애원을 했습니다. "독자들로부터의 그때
그때의 반응이 없으니까 내가 잘하는 건지, 방향을 제대로 잡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니 앞으로는 편지 좀 많이 보내달라."고
간청했어요. 그런데도 여전히 편지가 안 와요. 어쩌다가 오는 편지는
편지라기보다 장문의 논설이에요. 거창한 얘기하지 말고 지난호를 읽은
소감을 간단하게 적어 보내주면 되는데, 그런 편지가 없어요.
서양의 언론이 활성화되어 있는 중요한 이유는 독자투고가 활성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많아서 골라내는 일이 골치 아플 정도예요. 이러한 기초
여론 없이는 아무런 진보가 이루어질 수 없어요. 한국에서는 신문은
모르지만, 아마 잡지의 독자편지는 거의 편집자들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신문에서는 독자편지에 대해 진심으로
존중하는 것 같지 않아요. {한겨레신문}이고 {조선일보}이고 간에 하루에
서너 꼭지에 불과하거든요. 이렇게 인색한 것에 대해서 독자의 입장에서
압력을 넣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언론을 교육시키는 일이 가능해요.
열 셋 : 지금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
우리 아이들이 놀 데가 없습니다. 이렇게 야만적인 사회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이들이 놀 만한 공간은 전부 아파트와 상가가 차지하고
있어요. 자동차로 유린되지 않은 골목길이 없습니다. 하여간
최악입니다. 자동차가 많이 팔리고 자동차 자체에 대해서 아무런
반대여론도 없는 이 현실에 이의를 제기하고, 제동을 걸려는 몸부림은 흔히
비애국적이고 비애향적인 논리로 매도당하고 있어요. 끔찍한 상황입니다.
가난하더라도 아이들이 맑게 살아야 하는데, 이걸 위해 무슨 거창한 논리나
대의명분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의 입에 오염된 음식이
들어가는 것이 마음이 아파서, 방법이 없을까, 자식 키우는 사람 마음이 다
그런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웃집 아주머니 설득하고 그러면서 이런 일들을
시작하는 겁니다.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입니다. 아이들을 생각해
보십시다. 내가 아이들을 위해 한다고 생각하면 자기 체면 이런 거 돌아볼
필요가 없잖아요. 그러면 아이디어가 저절로 나오고, 그 작은
몸부림에서부터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랜 시간 잡담을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